나는 과거 종말론에 관심을 가졌을 당시 세상에 곧 종말이 임한다는 계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그 꿈이 헛된 것으로 판명 되었다. 그 후로도 의미심장한 이미지가 꿈에서 인식되곤 했지만 전과는 달리 그것을 가급적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림을 ‘읽다보면’ 당초 전제된 심상과는 전혀 다른 뜻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런 경우를 주로 계시로 인준하는 편이다.
(1)
과거 종말론이 전국을 강타했을 당시 대부분의 회집에서는 이 노래가 빠지지를 않았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 … 사막이 낙원되리라 //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그즈음 어느 날인가 꿈에 보이기를, 정각 6시를 가리키는 한 대형 괘종시계가 보이더니 “이제 곧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생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시한부 종말론 서적에서 나오는 식으로 나도 뭔가 신령한 계시를 받은 것 같은 냄새를 풍기며 사람을 대하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2)
미문(美門)을 시작한 이후 꾼 의미 있는 꿈은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① 날이 서지 않은 스케이트를 타며 무디디 무딘 날로 얼음을 지치느라 애를 쓰다 깬 적이 한 번 있었고, 또 한 번은 ② 광폭 타이어 달린 멋진 차를 타다가 차 뒤로 돌아가 보니 뒷 타이어 모두 펑크 나 있는 걸 보고 깬 적이 있다. 두 이미지 모두를 나의 부족한 영성으로 ‘읽는 데’ 활용하였다.
그리고 ③ 서로 맞붙은 두 개의 방에 얽힌 꿈을 하나 더 꾸었다. 직사각형인 한 쪽 방에서는 벽에 사람들을 둘러 세우고 하나씩 조준 사격을 하며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고(내가 그런 게 아니다), 계단 식 풀장을 갖춘 정사각형으로 된 바로 옆방에서는 갓난아기를 안은 부부가 있었는데 그 갓난아기를 풀장에 담그자(내가 안았을 것이다) 아기의 머리 뒤를 통해서 붉은 피 같은 것이 물에 퍼져나가는 이미지를 본 것이다. 처음에는 직사각형의 방을 나쁜 교회, 정사각형의 방을 미문(美門)교회 라는 식으로 읽었다. 그러나 아기 머리에서 퍼져나간 피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피도 나쁜 것이라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생명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되면서 좋아했다. 그렇지만 조준 사살을 하고 있는 직사각형 방은 여전히 ‘나쁜 교회’로 규정했었다.
이런 내용을 설교에서 한 후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그 두 방 모두가 나 자신이라는 개정된 방향으로 읽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생명을 배양하려는 나”와 “이성으로 뭔가를 조준하려는 폭력성의 나”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3)
위와 같이 그림을 읽는 방법은 비교적 심리학적인 측면이 농후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최초의 이콘(Icon)으로 소개되는 성 카트리나 수도원의 예수상의 경우, 읽을 수 있는 그림으로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두 눈이 짝짝이로 보이는 그 예수님 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과 사랑의 얼굴로 읽히는 그림이다. 이것을 이콘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그들이 사는 집의 실내는 집이 아니라 ‘동물들의 동굴’인 것만 같고, 뼈들이 돌출된 그 그림 상의 인물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야수’인 것만 같은 것도 모두 그 그림을 ‘읽을 때’에 알 수 있는 도상들이다.
(4)
6시를 가리키는 괘종시계를 ‘읽기’보다는 그림 그대로만 보다 보니, 그리고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장면을 ‘읽기’보다는 그림으로만 보다 보니, 우리는 진정한 종말을 계시로 받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본문 이사야서 11장 1-11절은 바로 그런 종말에 대한 대표적인 도상이다.
① 이새의 줄기 한 싹,
② 입의 막대기(세상을 침),
③ 입술의 기운(악인을 죽임),
④ 허리 띠(공의), 몸의 띠(성실),
등은 모두 심판의 도상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곧이어 평화의 도상도 전개 된다.
⑤ 이리-어린 양, 표범-어린 염소, 송아지-어린 사자, 암소-곰,
⑥ 소처럼 풀을 먹는 야수
⑦ 독사 굴
⑧ 독사 굴에 손 넣는 아이
서로 상반된 쌍이 잇따라 전개 되면서 그 평화를 표명하는 이 이미지를 대개 저 구름 속 하늘나라 이미지로 이해 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증인 같은 곳에서는 아예 지상천국 이미지로 소개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5)
신약성서 저자들이 이 그림을 어떻게 ‘읽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도상(마 3:1-12; 눅 3:1-18)을 통해 이 그림을 읽어나갔다.
세례요한이 등장하는 도상은,
① 약대 털로 된 옷 (짐승/야수)
② 가죽 띠 (허리띠)
③ 메뚜기와 석청 (먹이)
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은유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이상만 중첩되어도 유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더 결정적인 장면들이 추가 된다. 바로,
④ 독사이다.
일반적으로 세례 요한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친 것을 두고 그 독사들을 나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문에는 저 바깥에서 구경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러 스스로 나오는 자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이다.
누가복음에는 아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없다. 세례 받으러 나오는 일반 회중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⑨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겸손한 자를 판단”한다는
그 알 수 없는 이사야서 본문(11:4)의 해독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심판은 부자나 우쭐대는 자들을 대상으로 해야지 왜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심판하는가?
결국, 이사야서 본문이 지닌 도상은 심판이면서 평화의 잔치인 “세례 문전(門前)”의 도상으로서, 그 직사각형 방의 조준사격이 “나쁜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겨누고 있는 세례와 일반인 셈이다.
구름 속 하늘나라도 아니며, 이 땅에서의 지상천국 유토피아도 아니며,
오로지 ‘회개의 향연’이었던 것이다.
(6)
사람은 이처럼 다른 동물과는 달리 그림과 글씨를 사용하여 정보를 전달하고 취득할 줄을 안다. 글씨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림을 글씨처럼 읽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읽어내는 이러한 방법은 근대 들어 심리학이나 해석학 분야에서 응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처럼 고대 언어인 성경이 온통 그런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종말론에 등장했던 666, 바코드도 그림이다. 최근의 “베리칩”도 그림이다.
“괘종시계”, “날 없는 스케이트”, “펑크 난 고급 타이어”, “피의 세례를 준 아기”, “카트리나 수도원의 Icon”, “감자 먹는 사람들”도 모두 다 그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계시’를 완성하는가는 어디까지나 그 읽기 능력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에필로그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따라서 최종적으로 우리는 이사야서 본문 상에서 감히 “독사 굴에 손을 넣고 휘저을 수 있었던 아이”가 누구인지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는, 이 종말 도상의 궁극적 해석에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독사 굴에 손을 넣은 아이가 말한다. “나는 그 분이 아니요, 그 분은 바로 저기 저 분이시다” 라고.
* 2013.12.8일자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 사 11:1-10. (cf. 시 72:1-7, 18-19; 롬 15:4-13; 마 3: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