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나치게 ‘예정’에 민감한 이유는 예정을 일종의 ‘점지하는’(산신령과 부처님이 정해줬다) 행위로 오해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가령,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ㅡ”
ㅡ라 하였을 때, 우리를 장악하는 것은 예정만이 아닙니다.
뜻, 계획, 예정.
이 셋이 우리를 장악합니다.
여기에 서열을 정하면,
2) 뜻, 1) 계획, 3) 예정 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조차 ‘계획’대로 실행하므로 ‘계획’은 단연 1순위입니다.
예정 역시 이 계획에 소급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계획’이 가장 강력한 ‘예정’인 셈입니다.
그러면 ‘계획’이란 무엇일까요?
‘계획’으로 번역된 프로테시스(πρόθεσις)란 말은 빵(조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핏자를 주문하면 핏자가 조각나서 오는 이치입니다. 그 중 어떤 조각을 잡을까요. 내게 차례가 오는 조각이 있기나 한걸까요? 그래서 예정을 입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정을 입은 자는 기업이 되니까.
끝으로 ‘기업’으로 번역된 에클레로테멘(ἐκληρώθημεν)은 사실은 ‘택함을 받았다’는 뜻이 더 정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택함을 받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제비를 뽑아서입니다. 민수기에서 12지파가 땅을 나누기 위해 제비를 뽑을 때 이 단어를 썼습니다. 여기서는 수동형 동사이기에 제비를 뽑은 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가룟 유다는 떡 조각을 받은 바 있습니다. 핏자 조각은 여러 조각이고, 받을 사람도 많은데 하필 유다가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조각을 받을 바에는 “예정을 입지 않는게 나을 뻔하였다”라고 말하지 않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을 뻔하였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에 관한 설교 한 편 해둔 적이 있어 공유합니다.
오늘 하루도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