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이란 무엇인가? 해석이란 길을 내서 걷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유년 시절에 생각하기를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살다보면 이 세상의 모든 길을(심지어 골목길까지) 한번쯤은 반드시 밟고 지나가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헛된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 인간은 누구나 매우 한정된 길과 공간을 맴돌다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무수히 많은 지식을 접하고 경험하고, 무수한 지식을 재가공해 발화하지만 그 형식이 실은 제한된 길만큼이나 한정되어 있다. 무수히 많은 동사가 있지만 ‘나’, ‘너’, ‘그(들)’ 따위의 한정된 인칭에 막혀 그 동사가 지닌 경험들은 간소화되고 조직화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길처럼 문법에 갇혀있다. 이 갇힌데 길을 내 주는 것이 해석이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Συμεών)이라는 이 고령의 인물 역시 스스로를 갇힌 존재로 인식한 것 같다. (어린) 그리스도를 알현하고는 “이젠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라는 탄식을 토해내기 때문이다. 어디에 갇혔던 것일까? 누가(Luke)라는 기상천외한 문필가는 이 노인을 제사장 사가랴, 엘리사벳, 목자들, 과부 안나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초림을 맞이하는 주요 인물에 넣고 있는데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동선에서 맴도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사가랴는 성전의 깊은 곳에서, 목자들은 (성전으로부터 떨어진) 밖에서,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1세기의 팔레스틴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살았던 유대인의 인구는 학술적으로 약 50-60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다. 그 중에 성직자 수는 약 18,000명 정도였다고 전한다(3%). 우리나라의 경우 약 1천만 기독교 인구 중 목회자 수 60,000여명 정도인 현 상황에서도(0.6%) 이 아우성인치는 것을 감안하면, 1세기 팔레스타인의 성직자들이 직면한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가히 상상하고도 남을 법하다. 개교회 중심인 오늘날과는 달리 단일한 성전의 24직무를 중심으로 제의를 수행했던(문지기, 찬양 가수 포함) 그들은 1년에 약 14일간만을 성전 제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나머지 일수는 소수의 계급 사제만이 제의를 담당하고 나머지는 직급의 수준에 따라 생계가 막막한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 동물의 각을 뜨는 신성한 직무의 사제가 실제로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었던 사례는 매우 신비감을 떨어뜨리는 것이었지만 그게 그 시절의 현실이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무상급식 현장에서 초대교회로 투항한 ‘허다한 제사장 무리’란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회원 또는 후원 구독자 회원에게 공개된 콘텐츠입니다. 콘텐츠에 따라 회원가입만으로도 접근 가능한 경우가 있고 후원 구독자로 기한 약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로그인 후 확인하십시오. 콘텐츠 공개 정책 보기.

[yj_show_content role=”customer,contributor,administrator”]

그런 빈곤층 사제에 비하면 사가랴는 대단히 고위급 사제였다. 지성소에 근접할 수 있는 지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 고위급 사제가 그리스도를 알현하는 이들 소외 계층 목록에 포함된 것일까. 당시의 사제는 철저한 세습제였다. 큰 사제나 작은 사제나 그들의 지위는 종신제 밥줄이었기에 세습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는 그 직위를 차지할 수가 없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가문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일은 이들에게 중대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중요한 과업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족보를 잘 보관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엄격한 혼인법의 준수였다. 불법적인 결혼을 할 경우(족보가 없는 배우자와의) 그 결혼으로 태어나는 아이는 사제직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을 아론의 자손이라 소개한 것은 바로 이런 정통성 관련 진술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 혈통 좋은 부부에게는 크나 큰 핸디캡이 있었다. 이 좋은 세습직 지위를 물려줄 자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출신은 좋으나 자식 없는 이 부부의 처지는 단산하여 더 이상은 생명을 낼 수 없었던 당시의 율법이 처한 처지를 반영한다. 대가 끊기게 생긴 것이다.

누가는 이러한 사가랴의 소외를 반전시켜 늙은 엘리사벳의 복중의 아기가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반기는 극적인 장면으로 회생시킨다. 이는 일종의 쌍태이다. 배만 다를 뿐이지 같은 혈통이요, 같은 형통이지만 태 자체가 다른 쌍태로서, 하나는 율법이요 다른 하나는 복음을 표지한다. 이 이야기가 끝나고 밖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양떼를 지키는 소외된 목자들이 빛을 보는 장면이 소개되고, 그리고 이어서 이제 시므온 이야기로 넘어간다.

시므온의 정체성을 랍비 또는 율법사로 간주하여 심지어 그를 당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파의 수장 힐렐의 아들이라고까지 지목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20세기 초 정밀도가 떨어지는 감성적 주석서들이 쏟아낸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의 직무적 정체성은 사제 계열에 가까울 수 있다. 남은여생 뭔가를 기다렸던 거점이 성전인 점, 그리스도의 부모가 지극히 가난한 제물을 받치러 온지라 아무 사제도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자신이 받아 안고 중대한 신탁을 전한 점 등은 다 사제의 본분을 다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데려오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아오리스트εἰσαγαγεῖν를 씀으로 제사 이전임을 밝히고 있다. 시므온이 사제가 아니면 대신 가로챈 것인가. 제물이 하찮아 먹거리가 안 되니 사제 중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고 있었거나 시므온이 사제이거나). 당시의 사제직이 세습 직이기는 했으나 그 세습은 어디까지나 ‘사제로서’의 세습이지, 레위냐 아론이냐ㅡ라는 혈통상의 문제는 명목상에 가까웠다. 이를 테면 사제로서 ‘레위(계)’라는 명칭은 당시 결코 좋은 신분의 표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두가이파가 그 유서 깊은 혈통의 표지를 이미 훼손한 터였다. 그런 점에서 시므온의 (현직은 아니더라도) 사제적 정체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함께 등장하는 과부 안나조차 족보를 밝히고 있는 마당에 시므온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미심쩍은 일이다. 그는 누구일까.

안나의 조상이 아셀이라는 사실은 의미소의 실날같은 입구를 비춘다. 아셀의 어머니는 실바였고 실바는 레아가 데려온 하녀였던 것이다. (시므온은 레아의 소생이다.)

시므온이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의 이름을 지어주며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내가 (남편에게) 미움을 받으므로 나에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창 29:33)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유난히 미워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여동생이 성폭행 당해 복수극을 벌일 때 동생 레위와 함께 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살육을 벌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상의하지도 않고 일을 벌린 것이다. 이 문제로 인해 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도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첩을 범한 자신의 형을 대신에 차자인 자신이 장자권을 물려받을 만도 하건만, 그는 끝내 축복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훗날 자신의 배다른 막내 동생을 죽이려는 계획에 주도적으로 임한다. 이 일로 인해 그 막내 동생은 이집트에 팔려갔다 기적적으로 입신양명하고 전세가 역전된다. 식량이 고갈되어 구해달라고 찾아온 형제들을 막내 동생이 시험할 때 다른 모든 형제는 집으로 돌려보내면서도 바로 이 사람만은 ‘선택’하여 감옥에 억류해버린 것이다. 억류되었던 그가 지금 한 신실하고 의로운 부부가 데려온 아기를 보자 안으면서 이렇게 탄식을 하고 있다. “이제야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마치 베냐민을 데려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어린 그리스도와 그의 모친을 데려온 남성의 이름은 다름 아닌 요셉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기나긴 오랜 세월을 억류된 것으로 자각하는 이 노인은 혈통적 장자권 계승자임에도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무명이 되어버린 당대의 율법을 표상한다. 그것이 당시에 노쇠화의 길을 걷던 율법의 표지이다.

‘시므온’(Συμεών)은 노쇠함과 쇠잔함이 지닌 가치를 길로서 보여준다. 우리는 저마나 복음을 자처했지, 저 지고한 율법의 길은 모욕하고 토해내려 경망히 군다. 세습타파 피켓을 들기도, 동성애 옹호를 하기도, 성추행 목사를 끝까지 쫓아가 발본색원하기도, 손으로 지은 성전들에 침을 뱉기도, 겁주고 때려서 그 성전의 원리금을 충당하기도, 등돌리고 나간 자는 이단 취급을 하기도, 그 모든 것을 복음의 이름으로 행하지만 도리어 그것들은 시므온의 젊은 나날의 잔혹한 폭력에 가까운 것이다.

시므온은 젊은 날의 그 모든 살기와 잔혹함을 해제하고 가난한 그리스도를 기꺼이 맞음으로써 그 자신의 쇠잔함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었다. 이는 늙어서 무뎌진 쇠잔함이 아니라, 지고한 세월을 통한 마정에 따른 결과이다. 이로써 그는 아버지가 내린, “폭력의 도구”라는 율법적 오명의 기한을 모두 이행하고 마친 것이다.

그는 이제 새로운 생명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단번에 알아 본 비결이 되었다.

* 2017.12.31. (cf. 눅 2)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yj_show_content]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