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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은 계시록 3장,
문을 그냥 통과하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20장,
두 도상은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제자들이 모인 곳 문들을 다 닫아 걸고 있었다는 성서일과 중 한 대목을(요 20:19-31) 읽다가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

가정에서의 공동체 모임을 5년 정도 지속하다 바깥으로 나와서 모일 때의 일이다. 예배를 시작한 지 1년 6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자발적 신자가 찾아왔다. 가정이 아닌 공간에서 예배드리고서 무려 1년 반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주일 예배를 막 시작하려는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낯이 익은 분이었다. 그분이 좌석에 앉기도 전에 이내 누구인지 생각났다.


약 9개월 전의 일이다. 하루는(금요일 낮이었을 것이다) 교회에 홀로 앉아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문을 벌컥 열고 고개를 내밀더니 이렇게 물었다.

“여기 교회 아닌가요?”
“네..네, 맞습니다. 어디서 오셨죠?”

그러자 그분은 대뜸 쏘아 붙이듯 물었다.

“여기는 아무나 기도하면 안 되는 곳인가요?”
“네?…그게 무슨…저…어디서 오셨…”

당황해 금방 답을 못하자 더 날카롭게 물어왔다.

“여기는 교회 아니에요? 아무나 기도하면 안 되는 곳이냐구요?! 탐탁지 않으신 것 같네. 목사님이세요?”

따지듯 묻는 통에 당황하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신천지도 왔다 가고, 구원파도 뭐 이상한 인쇄물 놓고 가고 하니까요, 그래서 묻는 거에요. 어느 교회 다니시는데요?”
“감리교회요.”

하고 짤막하게 얼버무리는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들어오라 했다. 그리고 편한 데 앉아 기도하시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설교단 뒤를 가리키며 큰 십자가가 걸려 있지 않다는 말로 시작하여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기도하러 왔어요 목사 가르치러 왔어요”

그러자 주섬주섬 자기 짐을 다시 챙기더니 나가면서 한 마디를 던지고 갔다.

“겸손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띵)

이 짤막한 대화에서 두 마디가 나의 내면을 깊숙이 찔렀다.

1) “여기는 교회 아니에요? 아무나 기도하면 안 되는 곳이냐구요?!”
2) “겸손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실제로 나는 아무나 여기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생각을 내심 밑바닥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헐~ 그 할매 영험하네?) 그리고 나는 겸손하지 않다. (헐~ 그 할매 영험하네…?) 하나님이 보내셨나? 그러나 이내 나는 이 폐부를 찌르는 참소를 떨쳐버리고 다음과 같이 극복하였다.

첫째, 나는 겸손한 사람이다. 아주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다. 이를 테면, 이사 온 이 건물의 화장실 청소를 2년간 나 홀로 하였다. 화장실이 막혔을 때는 젓가락으로 후벼 파기도 하고, 여성 화장실의 오물조차 2년간 거르지 않고 처리해주었다. 용역을 쓰거나 다른 이웃 입주자들을 호출해 낼 수도 있었지만,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혔다.

둘째, 교회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죄인이 오는 곳이다. 시건방진 의인들이 교회를 더럽히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교회의 본질은 죄인이 오는 곳이다. 저렇게 무례하게 들어와서 무례를 범하는 자들은 대개 ‘작은 교회’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여기서 한 5분만 걸어가면 수백 배 큰 교회들이 있다. 저런 무례한 자들은 아마 그런 교회에 가서는 하나님께 절하듯 납작 엎드릴 것이다. 담임 목회자 눈길 한 번 얻고자 간절함의 간절함을 지어 보이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내가 겪은 이 짤막한 일화를 통해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교회라는 곳에서는 과연 ‘어떤 자들이 남게 되고, 어떤 자들이 남아 있지 못하게 되는가.’ 그 근원적 요인을 알아낸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 ‘불러서 온 자’와 ‘자발적으로 온 자’의 차이라는 사실이다. 저 노파처럼 자기 발로, 자발적으로 온 자들은 대개 저런 행태를 본성으로 소유한다. 오로지 ‘불러서 온 자’, 부름을 듣고 온 자들만이 그 구속력을 감당한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도 불러서 온 자이며, 전직 세리였던 마태도 불러서 온 자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주역이 다 부름을 듣고 온 자였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자들이 있다’ 하였는데 저 노파가 그였던가 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 할머니를 적절하게 대우해 준 셈이다.


이 일화 속의 할머니가 주일 예배 시간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얼굴 색/표정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설교 직전까지도 계속 그러했다. 설교를 듣는 중에 다소 얼굴이 펴졌다. 예배가 끝나고서는 얼굴이 완전히 펴져 웃기도 했다. 예배 후 다과도 나누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가고 나서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
Christ at the Door (1946) by Warner Sallman

저런 자발적 신자들은 부지중에 만난 천사라기보다는 마치 우리의 폐부를 찌르며 심금을 울리던 저 그림의 그릇된 적용만큼이나 허위가 아닐 수 없다. 근대기 성화 작가 워너 살만(Warner Sallman)이 그린 이래 수많은 유사 작품에 차용된 저 도상 속 대문에는 언제나 손잡이가 없다. 안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주님이 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문을 닫아 놓은 우리의 폐부를 찔러 온 것이다. 그러나 저 문은 교회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자발적 신자 자신의 교만한 마음 문이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라오디게아로 표지된 자발적 신자 자신의 미지근해진 마음 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닫힌 문을 통과해 들어오신 예수님

부활 직후의 예수님은 닫힌 문을 그냥 통과해 들어오시는 분이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유대인들의 기소를 두려워 한 나머지 문들을(문이 여러 개이다) 모두 닫고 있던 그곳에 예수께서는 어느새 들어오셔서 평강을 기원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성이요, 다름 아닌 부활의 속성, 곧 빛의 속성이다. 그리고 참된 자발적 신자의 품성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또 다시 잠긴 그 문을 통과해 들어오셨다. 문은 잠겨 있다. “닫았다”는 뜻 클레오(κλείω)는 분명 잠갔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 20:26
Genesis to Revelation (1873)

처음 오셨을 때 도마는 부재 중이었다. 함께 있을 때 자신이 부재 중이었던 것은 생각지 않은 채 믿지 않는 사람,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는 사람을 위해 다시 설명을 반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하지만 그분은 이번에도 평강을 기원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성이요, 부활의 속성, 곧 빛의 속성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참된 자발적 신자가 상속받아야 할 인격이요 속성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본성인 그 빛은 평강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 1:6

허위의 자발적 신자는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예수님의 형상도 아니요, 문을 통과해 들어오신 예수님의 형상도 아니다. 자기 의지에 의존해 함부로 드나드는 이 자들은 고객으로 전락한 기독교 소비자로서 군상일 뿐이다. 하나님 사귀러 온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 두 도상은 다음과 같은 차이를 반영한다.

잠긴 문을 통과하는 도상은 부활과 그 현현을 표지한다. 선택 받은 것이다. 반면에 잠긴 문을 두드리는 도상은 부활과 그 현현에 대한 망각을 표지한다. 아예 선택 받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부르심은 받았지만 택함 받지 못한 것이다.

두 도상은 두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태도를 반영한다 하겠다.

문을 두드리면 안에서 문을 열 것이며, 문을 통과해 들어왔다면 평강을 빌지어다.

부활 후 2주차 | 성서일과, 행 4:32-35; 시 133; 요일 1:1-2:2; 요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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