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듄>(Dune)에 담긴 혼합 종교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관찰한 글입니다. 원글은 <영화 ‘듄’을 기독교인이 보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2021년 11월 경 전편 개봉 당시 냈던 글인데 이번에 파트 2가 나오면서 배경이 생소한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다시 소개합니다. 약간의 스포는 파트 1에 해당하므로 참작하시기 바랍니다.
<영화 ◯◯◯을 기독교인이 보는 법>이라는 형식의 제목으로 연재를 하고 있다. 이런 제목을 붙이다 보면 마치 그 영화를 기독교인이 꼭 봐야 한다는 의미인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영화를 통해 노출되었을 기독교 세계관에 해독(解毒)을 가하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성경 읽고 기도나 하시지 영화를 왜 보시겠는가. 제가 대신 보고 이렇게 대신 내용 소개해드리는데. 여러분은 꼭 성경 읽고 기도만 하며 사시길.)
문화 자체를 아예 멀리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순혈’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광야나 사막으로 들어가 집단생활을 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그런 씨족사회 방식으로 살다가는 유전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면역력 저하뿐 아니라 기형아 출산율이 오히려 높아지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그 기형의 단적인 예이다)
그런 점에서 이 같은 문화 해독(解讀, 이번엔 ‘解毒’이 아니다) 작업은 일종의 문화 예방접종 정도로 이해했으면 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독자라면, 문화를 통한 기독교 세계관의 확산까지 어렵지 않게 전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순혈주의 후예로 여기기 좋아하는 기독교인들이 사실은 종교로서의 기독교보다는 문화로서의 기독교에 먼저 포섭되었듯이.
무속을 버리고 기독교를 선택하는 사람보다 무속을 대신해 기독교를 선택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영화 <듄>은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이다.
듄의 세계관인가, 세계관 속의 듄인가
듄(dune)은 영어 down과 어원이 같다. 고대 갈리아인의 어휘 중 ‘작은 언덕’이라는 뜻의 dunom에서 온 말이다. down은 ‘(언덕을) 내려간다’는 의미로 굳혔고, 듄은 ‘모래 언덕’이라는 의미를 보전한 채 굳었다.
영화 속 주인공 가문의 표지가 투우사인 것은, 스페인을 포함하는 유럽인의 조상이 이 어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듄> 콘텐츠 관련 팬덤 사이에서는 이 가문의 정적인 하코넨 가문의 성씨가 수소를 뜻하는 핀란드어 하르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주인공 폴의 아버지 레토 공작의 선친 파울루스는 투우를 하다 황소에 받혀 죽었고, 그의 아들 레토는 황소 같은 거구 하코넨 남작에 의해 죽는다.
이 어족의 북유럽 신화 영향권 안에 있는 영국은 신화와의 연장 선상에서 일찍부터 판타지 문학에 유연했지만, 미국은 1965년 출간된 이 작품을 비로소 미국식 판타지의 전형으로 꼽는 것 같다. 여기에는 신화 대신 과학이 장착되었다.
영국으로 피난 온 전쟁고아를 돌보던 C. S.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에서,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J. R. R.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현실계의 이데올로기를 유연한 신화적 필치로 녹여내고 있다면,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 과학과 우주적 세계관을 입힌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면 무리 없다(두 사람 모두 기자 출신이다).
미국 경제 대공황 당시 은행가들에게 땅을 빼앗겨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야 했던 조드 일가의 삶을 다룬 것이 <분노의 포도>였다면, <듄>은 황제와 하코넨의 경제적 모략으로 아라키스 행성으로 이주해 멸문당하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서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유럽의 판타지가 다분히 이념적 세계관이라면 미국 판타지는 다분히 경제적이라 할 수 있다. 악의 형상에는 언제나 경제를 입혀 자기 신념을 구현하려 들기 때문이다.
‘듄의 세계관’이란 말은 이런 경제관 속 듄이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작품을 감싸고 있는 세계관이 자주 변용된다는 사실에 있다. 대부분의 리메이크 작품이 그렇듯, 새 옷을 입혀 재연할 때는 그 작시자(감독이나 제작자) 혹은 관객이 몸담은 세계의 눈을 두르고 다시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2021년판 듄에는 1960년대 미국의 문제였던 ‘경제 문제’ 위에, 오늘날 미국의 문제로 급부상한 ‘종교 문제’가 덧입혀졌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종교 섹트가 엿보인다.
종교 혼합인가, 종교 통합인가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출전을 준비하는 하코넨과 황제의 연합군 출정식은 마치 고대 로마군의 출정식을 연상시키면서도, 십자가에 벌거벗긴 사람들을 거꾸로 매달아 피를 내는 의식은 마치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 출정식을 연상시킨다.
듄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국가 종교로서의 한 양상으로 비친다. 여기에 신학 용어를 적용해보면 오소독스(orthodox), 우리말로는 ‘정통’으로 옮길 수 있겠다.
이 정통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축출의 대상이 되어버린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수장 레토 공작에게는 사랑하는 여인 제시카가 있다. 그녀는 왕비처럼 등장하지만, 첩에 불과하다. 그 신분이 정통이 아닌 까닭이다.
베네 게세리트라 불리는 이 베일에 싸인 신분 집단은 인류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끈다는 명분 아래 온갖 권모술수와 심지어 기획 교배도 서슴지 않는 집단으로 묘사된다.
이들에게는 예지 능력이 있다. 이 예지력의 여성과 레토 공작과의 동거는 마치 성경에서, ‘예언하면 죽이라!’ 자신이 언명했음에도 그들의 예언이나 조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왕들과 예언자들의 공생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사울같은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사울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른바 오소독스로 불린 정통이 자기 명맥을 잇기 위해 벌이는 다양한 막후의 혁할은 비(菲) 정통한 공생 관계와 무엇이 다른지 의문을 남길 때도 있다.
사울이 이런 비의(秘義) 신앙과 단절하지 못한 자였다면, 성군으로 꼽히는 다윗은 이와는 철저히 구별된 정통, 즉 국가 신학의 창시자로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밧세바와의 불륜을 규탄한 예언자 나단이 정작 그녀의 아들이 등극하도록 조력하는 의외의 역할은 이런 막후의 공생 관계로서 좋은 예시이다. 베네 게세리트와 뭐가 다른가?
이 영화에서 레토 공작이 죽기 직전 아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의 생모에게 ‘살려달라’고 당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은 이런 국가 신앙과 비의 신앙 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결탁 관계를 표지한다.
역사 속에서 이들 정통과 비의 신앙이 공존하면서 이루어간 주요 내용을 묶어 우리가 교회사라 부르고, 여기서 비의 신앙과 섹트를 제거한 이론을 교의학이라 명명한다.
이런 공존의 흐름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에도 있었고 현대 우리 사회에까지 흐르고 있다. 때로는 정통에 억제당하고 때로는 정통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명맥을 이으려는 역동성을 감당한다.
가령 스스로 정통을 자처하며 자기네끼리 갇혀 지내는 한국인 목회자/신학자 중에는 존 웨슬리조차 이단으로 규정하는 기형아들이 정통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의 예배 억압 정책 속에서 정통의 목소리보다 비정통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던 사례는 이런 공존의 역사 흐름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공존 속에서 정통을 이룩해가는 과업은, 통합이라 정의함이 타당하다. 통합은 혼합과는 다른 말이다. 혼합은 둘 이상의 주체를 녹여 섞어버리는 것이고, 통합은 그 명확한 주체를 녹이기보다는 합치는 것을 말한다. 정확히는 통폐합이라 하겠다.
종교개혁만 하더라도 단지 분리로써 완성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통합 과정을 통해 비로소 완료될 수 있었고, 또 그러느라 오랜 시간이 소진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순혈주의 노선에 선 기독교인은 통합과 혼합을 잘 구별해서 써야 한다.
2021년판 <듄>에서의 혼합은 프레멘이라는 섹트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신성한 칼의 이름 ‘크리스나이프’가 바로 이 혼합의 상징이다.
크리스나이프와 크리슬람
크리스나이프는 샤이 훌루드라는 모래 괴물의 이빨로 만들어진 검이다. 이 검은 주인의 생체 흐름을 인식하기 때문에, 주인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스스로 파괴된다. 칼집에서 한 번 뽑으면 피를 묻히기 전에는 다시 넣을 수 없는 프레멘들의 성물이다.
프레멘은 사막에 주거하는 집단이다. 사막은 이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이자 힘의 원천이다. 이들 프레멘의 전설에 따르면 외계에서 온 메시아와 그를 낳은 여성이 프레멘을 이끌게 될 것이며, 바로 이 검 크리스나이프가 그 길을 인도할 것이다.
이 같은 사막이 지닌 이상과 이념을 듣노라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그것이 이슬람 가치에 관한 서술임을 눈치챌 수 있다. 특히 저 성물의 검을 메시아와 연결짓는 장면을 보노라면, 어느새 검의 이름 크리스나이프는 마치 ‘크리슬람(Chrislam)’이란 음가를 떠올리게 된다. 크리스나이프. 크리슬람.
크리슬람이란 단어는 미국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격돌하던 나이지리아 선교 지역에 기원을 둔 신조어이다.
성경과 꾸란을 모두 인정하며,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과 ‘알라’ 이름은 물론, 두 경전을 함께 봉독하는 신흥 종교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혼합 종교가 1990년대 말 무브먼트 성격을 갖추면서, 2000년대 들어 미주 지역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릭 워렌 목사는 오바마 전 대통령 취임식에서 기도할 때 “in the name of ‘Yeshua’, ‘Isa’, and Jesus.”(예슈아, 이사, 지저스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로 끝마쳐 교계에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사(Isa)가 아랍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스나이프는 크리슬람과는 문자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크리스나이프는 Chris-knife가 아니라 Crysknife이기 때문에, Christianity와 Islam을 합친 Chrislam과는 아무런 의도나 연관성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Crysknife는 통상 ‘크라이스-나이프’라 독음해야 하는데 왜 ‘크리스-나이프’라 독음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 영미권 독자/관객이 ‘크라이스’가 아닌 ‘크리스’로 독음하고(한글 자막에도 크리스나이프로 번역), 원저자 역시 살아생전 크리스나이프임을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Crysknife는 Cry(우는) Knife(칼)이 아니란 말인가?
프랭크 허버트가 원작에서 이 무기를 도입했을 때는 자바섬의 전통 유산 중 Kris라는 단검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84년판 <듄>에서의 칼은 상기와 같은 모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모양이 2021년판 <듄>에서는 다음과 같은 모양으로 변모했다. 이런 변화에는 문자적 혼합보다 더 선명한 혼합의 기호가 은폐되어 있다.
현존하는 크리스나이프 칼날의 형태는 종류에 따라 60-250여 가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다양한 칼날 형태는 대체로 직선으로 펴진 형태와 물결처럼 구불거리는 형태 두 종류로 추릴 수 있다.
약 800년경 인도네시아 자바를 중심으로 나타난 이 검은 동남아시아에 널리 보급된 검이다. 인도네시아가 아니더라도 이 검의 주술적 의미를 주변 나라와 지역이 전통으로 이어받고 있다.
초기 모델은 직선 형태였을 것으로 보고되지만, 실제 초기의 형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검이 최초로 등장했던 시기의 형태는 틀림없이 물결처럼 구불거리는 형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검의 용도가 부적으로서 마술적인 의미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술적인 굴곡의 단검이 직선형으로 펴지게 된 계기는 실전용 검으로 변모하면서이다. 이 검이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지기까지는 인도네시아 마자파힛 왕조의 세력이 융성했던 결과로 알려졌는데, 이 검의 실용 모델의 연대인 14세기는 이 왕조의 건국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왕조가 패망하면서 이 검은 직선 형태뿐 아니라 다양한 물결 모양의 굴곡 형태를 띠게 된다. 실전용에서 주술적인 의장용 검으로 용도가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검 수집가들은 물결 치는 형태의 검이 적을 공략할 때 치명적이었다고 하나, 그것은 마치 이슬람의 초승달 모양 ‘월곡도’가 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는 소리 만큼이나 소설에 가까운 왜곡이다.
실제 이슬람이 십자군을 떨게 했던 11-13세기 실전용 검은 모두 직선형이었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크리스나이프를 실전용으로 개량한 마자파힛 제국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킨 세력도 바로 이슬람이기 때문이다.
이 크리스나이프 문화권을 아랍의 이슬람 군대가 들어와 점령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느 아시아 지역이 그랬듯이,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 군도 역시 초기에는 상인이나 선교사와의 관계로 시작된 왕래는 이내 서구 식민주의와 이슬람이라는 두 다른 세계와의 관계로 전환된다.
군도의 원주민은 다른 세계 사람들이 가져온 낯선 상품이나 기술, 그리고 그 기술을 도입해 직접 사용하면서 자존감이 급격하게 떨어졌는데, 이것은 진정한 패배였다.
이런 침투와 식민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군도는 보다 개방되었고,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그에 따른 사회 재편은 군도 원주민의 문화와 신념 그리고 상징을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만든 반면, 서구의 세계관은 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만일 독자들 중 발리 섬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본 분이라면, 미신의 일상화를 어렵지 않게 목격하였을 것이다. 어떤 상점을 가든지 문지방에 놓여 있는 잿밥들, 어떤 토속 전시관을 가든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도상 속의 요괴들, 이런 열등한 종교의식은 멸망한 마자파힛 제국의 패배감의 축소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슬람에 멸망한 그들이 발리로 피신한 결과로서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제국을 멸망시킨 이슬람은 한 마디로 내재적 이슬람이었다. 물결처럼 구불거리는 검이 상징하는 바, 난삽한 힌두 전통의 크리스나이프보다는 이슬람의 크리스나이프가 자신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었던 것이다. 이것 말고는 힌두교와 불교로 뒤덮였던 군도 전체가 광범위하게 개종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슬람 전문가들은 이를 수피 이슬람(Sufism Islam)으로 분류한다. 겸손, 샤리아(이슬람 율법), 정화, 헌신과 절제, 세습 타파 등 생활을 파고드는 모종의 신비주의 영성의 검이 물결처럼 구불거리는 검을 대체한 셈이다.
밀려드는 새로운 시대 질서에 이런 정신력 외에는 자신들의 손상된 자존감을 회복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짤막하고 물결 치는 굴곡 모양의 1984년판 크리스나이프가, 길고 곧게 펴진 2021년판 크리스나이프로 대체된 기의(signifié)라 할 수 있다.
이는 적지 않은 서구 젊은이들이 용감하게 자발적으로 IS 본진을 향해 투신했던 콤플렉스와도 이어져 있다. 서구 문명에 비해 ‘사막의 삶의 방식은 가치이자 힘의 원천’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이 사막의 가치에 반해 난삽해진 미국 중심의 서구 문명은 이들에게 그야말로 사막의 스파이스(Spice, 영화 속 천연광물)나 착취하는 황제와 하코넨 일당이었던 셈이다.
이 영화에서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멸문시킨 하코넨 남작이 독극물 중독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치유의 목욕탕을 가득 채운 검은 액체는 (스파이스를 포함해) 중동의 석유를 기호화한다.
이것이 바로 혼합이다. 내재적 이슬람.
크리스천과 크리스나이프
서구 사회뿐 아니라 우리 사회 크리스천의 검이 물결처럼 화려한 곡선에 매몰된 채, 이제는 사물 하나도 찌르고 베지 못하게 된 참상은 실로 위험천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구불거리는 곡선과도 같이 난해한 정통 논쟁으로 자기 승리감에만 젖어 있다가, 날선 크리스나이프에 모든 것을 잃을 것이 자명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술탄의 군대가 쳐들어와 사막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결치는 곡선에 환멸을 느낀 자기들 스스로 술탄을 자처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모래 언덕, 듄이 가리키는 기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여기서 말하는 날선 검 마카이라(μάχαιρα)는 구체적으로 로마 시대 글라디우스(Gladius)를 일컫는 말이었다. 로마인들이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도입한 빠르게 찌르고 베는 용도의 곧게 뻗은 칼, 이 검이 크리스천이 굳게 잡아야 할 크리스나이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