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해제 #16. 헤겔의 위치
이제 제법 정신사적 전개가 누적 되었으므로
각 매듭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그 궤적을 훑어드릴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 하면, 그 낱개의 실적이 갖는 개념보다는
전후 구간의 상대적 위치 속에서 그 사람의
공적 혹은 폐해를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 궤적은 다음과 같다.
1. 어거스틴에서 아퀴나스로 넘어가면서는 목적론의 방향이 바뀜.
플라톤(어거스틴)은 내림차순 목적론.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는 오름차순 목적론.
○ 내림차순 목적론: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 오름차순 목적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사랑 받고 있지요 (x2)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사랑 받고 있지요~~~
2. 데카르트에서는 목적론 붕괴의 초석이 다져짐.
인간의 신체(물질)를 빈 봉지로 관념화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사물과 사물의 이치에 대한 경외감을 제거.
이제 자유롭게 마음껏 다룰 수 있다!
○ “중력의 목적은 입 안으로 사과가 떨어지길 바라는 것 뿐이야~~ㅋㅋㅋ”
3. 칸트는 그 관념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쾌거.
정신성을 ‘단지 물리일 뿐’이라는 정서가 팽배한 가운데서(그래서 관념이라는…)
정신성을 정신성답게 정위시킨 쾌거
그래서 (정언)명.령.이라는 용어 성립.
○ 그러나 여기서 ‘명령’하는 명령 주체는 모호. 기독교 신이라 하기도 어렵고(왜? 설령 기독교 신이라 하더라도 당대의 세계관에서는 다른 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일반적인 신으로서 이미지) 신학적 신이라 하기도 어렵고
그냥 인본적 신의 범주로 보는 것이 타당. 칸트라 할 지언정.
(데카르트는 관념을 ‘물리’라 한 것에 반해, 칸트는 비로소 ‘정신’이라고 한 것뿐. 정신으로서 관념!)
4. 그런데 헤겔이 나타남.
헤겔은 정신사의 데카르트 같은 존재.
왜? 데카르트는 물리 현상으로서 관념을 주물렀다면
헤겔은 그야말로 정신으로서 관념을 주무르기 때문에.
(여러분! ‘관념’이 정신인가? 정신이면 어떤 ‘정신’? ← 이것이 데카르트 만큼의 위험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게다가,
데카르트는 합법적 <의심>을 조장했다면,
헤겔은 바로 합.법.적. <모순>을 집대성하기 때문에
정신사의 데카르트 같은 존재라는 것.
이 합법적 <모순>을 이해하기에 앞서
역사라는 개념과 변화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함.
그것은 이따가 다음 회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