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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8절 주석
아담 부부가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었다고 하였을 때, 그들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음성이었나? 다음 절 9절에서 소개되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음성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기척이었을까? 여기서 음성으로 번역된 콜(קוֹל)은 사운드(sound) 즉 ‘소리’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음성이 어떤 음성인지 모호하기에 개역개정판에서는 공동번역을 따라 ‘하나님의 소리’로 개정하였으며 그것은 그야말로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사운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소리’란 하와가 먹은 선악과를 아담이 먹을 때 분명하게 경청했던 아내의 ‘음성’이었다(3:17). 그런가 하면 가인이 동생을 죽였을 때 땅에서부터 울려나와 하나님에게 호소했던 피의 ‘음성’이기도 하다(4:10). 따라서 날이 ‘서늘할 때’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은 마치 산들바람이 불 때(공동번역의 표현) 감지된 모종의 기척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8절에서의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과 아담의 일상성(日常性)의 (큰 목적이 없는 보통의) 대화일 수 있다. 바로 이 일상성이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로소 다음 절에서 명시적인 이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일상성으로부터 피하였다. ‘하나님의 낯’은 그 일상성의 표지이다. 낯으로 번역된 파님(פָּנִים)은 얼굴이다. 더 정확히는 ‘얼굴들’, 복수이다. 한 사람의 얼굴을 가리켜 ‘얼굴들’이라 부르는 것은 히브리어의 특징이다. 눈, 코, 입, 각 지체의 합을 얼굴로 정의하는 까닭일 것이다. 즉 눈도 얼굴이요, 코도 얼굴이요, 입도 얼굴이다. 이는 얼굴을 생김새라고 규정하는 정의보다 훨씬 본원적이다. 파님은 ‘~로부터 돌아서다’ 또는 ‘~를 향해 돌아서다’는 뜻을 가진 파나(פָּנָה) 동사에서 유래하였는데 ‘관계(하다)’는 기능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눈은 생김새가 아니라 보는 것이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보인다. 귀는 생김새가 아니라 듣는 것이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들린다. 얼굴 중에서 눈과 귀와 달리 통제가 가능한 유일한 것은 입(과 혀)뿐이다. 입을 벌린다고 해서 말이 혼자 튀어나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인 눈과 귀를 통제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방식으로. 그리고 일부러 제어 능력을 상실하는 방식을 통하여 말/소리를 냄으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다. 이것을 가리켜 ‘인식의 파괴’라 부른다. 오로지 코만은 순수하다. 냄새 맡고 싶은 것만 맡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마저도 저열하다.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 이 둘밖에 모르는 코마저도 자신에게 나는 냄새는 맡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인식을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 하나님의 낯/얼굴을 피하는 오늘날까지 전래되어오는 방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