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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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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3장 16절 주석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를 명시적 저주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앞서 뱀에 대한 저주는 명시적인 것이지만, 여자와 남자에 대한 처우는 질서에 대한 명시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근거가 바로 ‘잉태하는 고통’과 ‘자식을 낳는 수고’이다. ‘고통’과 ‘수고’는 원문에서 사실상 ‘고통’을 뜻하는 같은 말이지만, 약간 상이하여 ‘고통’과 ‘수고’로 구별해 옮긴 듯하다. 앞의 고통은 ‘고통과 잉태’(עצבונך והרנך)이다. ‘잉태의 고통’으로 의역한 것이다. 뒤의 고통은 ‘고통 안에서 아이를 낳는 것’(בעצב תלדי בנים)이다. 이 두 고통은 동의어지만 다른 낱말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 쓴 이차본(עִצָּבוֹן)과는 달리 후자의 고통을 에체브(עֶצֶב)로 단축한 것은 에츠(עֵץ)로 불리는 ‘나무’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앞서 2장 9절의 주석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은 대개 이 여자가 ‘열매’를 보고 관상(觀賞)의 즐거움을 느낀 것으로 간주하지만 열매가 아니라 열매를 ‘잉태하는 나무’(에츠 오세 페리)를 보고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그 탐심의 충동을 격발시킨 탐미의 대상은 열매가 지닌 관능미가 아니라 나무에 맺히는(잉태되는) 현상의 관능미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가리켜 아예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 맺는” 나무라고 번역한 공동번역은 창조 본래의 미(美)를 훼손한 대표적인 예시라고 앞서 이미 일러두었다. 이것은 앞서 11절에서 ‘실과’(פְרִי)란 말이 없는 이유와도 절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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