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 아담에게서 태어날 미래의 다른 후손/종족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명(Delitzsch), (2) 다른 동물/들짐승을 가리킨다는 견해(Josephus),
(3) 본문에서는 생략된 다른 형제 종족이라는 설(Havernick) 따위가 있으나 천지창조에 이어서 아담, 하와, 가인, 아벨의 개인사/가족사로 이어지는 읽기를 지배하는 것은 역사 방법의 전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독자 관념은 이 근대적인 역사 개념에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담에게서 태어날 미래의 다른 후손으로서의 다양한 종족으로서가 아니라, 이 창조 이야기를 전수하고 보전했던 일군의 지적 집단이 바로 이 이야기의 기원이라는 사실은 이야기 배후를 진공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근대식 역사 방법을 압도한다. 이것을 ‘전승’이라 부른다. ‘역사’는 객관으로 위장하지만, ‘전승’은 주관으로 범위를 한정한다. 여기서 나온 결과를 ‘정경’이라 부르는 것이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인 것처럼 가인은 누군가의 표징이다. ‘아벨은 양 치는 자’요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는 전제는 다 이와 같은 표징에 관한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이 지면에서 쫓겨난 자’ 즉 주의 낯을 보지 못하게 되어버린 자들을 어떤 부류의 종족으로 특정하는 지가 이 본문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핵심의 핵심으로 감싸고 있는 이 쫓겨난 자들의 고엘(גאל, Goel)이 되고 있는 하나님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