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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키 마스터

      말이 나온 김에 Zoe와 Bios.

      ㅡZoe가 자연인이고 Bios는 시민인가에 관하여

      ζωή(조에)와 βίος(바이오스)라 쓰고 읽는다. 둘 다 삶/생명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러나 ζωή(생명)의 어근인 ζάω(내가 살다)나 부정사 ζῆν(살아 있는 것)의 안티 테제가 ἀποθνήσκειν(내가 죽어 가고 있는) 상태인 것에 반해,
      ζωή의 안티 테제는 타나토스(θάνατος) 곧 완전한 죽음이다(cf. 롬 8:38; 고후 5:4; 렘 8:3; 전 30:17; 플라톤의 Legg. xii. 944 c). 즉, ζωή는 보다 완전한, 보다 근원적인, 보다 영원한 생명의 호흡과 연결되어 있는 생명이다.

      그러나 ζωή가 이와 같이 생명(력)에 더 집중해 있는 동안, βίος로서의 생명은 삶의 어떤 기간이나 광범위한 범주에 해당하는 삶으로서, 그래서 그것은 이차적 의미에서 생명이 유지되는 어떤 수단이기에, 삶이 소비되는 방식을 표명하는 용어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노선, 직업… 따위들이 이 βίος로서의 삶에 속하는 용법이다. 그래서 Facebook이나 Twitter에서 자기소개란 항목에 ‘Bio’라 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치적으로는 ‘밥만 먹고 사나?’ 라는 물음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으로서의 생명/삶에 βίος라는 용어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밥만 먹고 어찌 사나?’ 물는 동안,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ㅡ라고 묻는다. (마 4:4; 눅 4:4; 신 8:3)

      이때, 여기서
      “Οὐκ ἐπ’ ἄρτῳ μόνῳ ζήσεται ὁ ἄνθρωπος”
      ㅡ라는 문장은 βίος(삶)이 아닌 ζωή(생명)을 묻는 말이다.

      ζάω에서 온 저 ζήσεται는 살아가는 동력이 ‘나’ 주어가 아니라 빵의 동력으로 살아가는 삶을 지적하는 중간태이며, Bio 즉 βίος는 성서 저자들이 통상 현실 ‘실존적인 삶’, ’살림 살이’를 뜻하는 의미로 대개 구별해 썼던 것을 감안할 때,
      사실은 정치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밥만 먹고 사나?’를 뛰어 넘는 제안이라 하겠다.

      참고로 빵 사먹을 두렙 돈을 다 바친 과부를 가리켜 ‘이 과부는 생계를 다 바쳤다ㅡ’고 칭찬할 때
      ‘생계’가 바로 βίο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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