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시험과 성령의 시험 차이─이 글은 다윗의 인구조사를 둘러싼 문제를 다루면서 ‘시험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의 동인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봅니다. QT 형식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본문
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역대상 21:1-17
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
3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4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드디어 요압이 떠나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5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
6 요압이 왕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7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9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내어 놓으리니 그 중에서 하나를 네가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11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그에게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12 혹 삼년 기근이든지 혹 네가 석 달을 적군에게 패하여 적군의 칼에 쫓길 일이든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전염병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천사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이든지라고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지를 결정하소서 하니
13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빠졌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더라
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16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 여호와의 천사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하늘을 향하여 편지라 다윗이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17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
관찰
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1절)
2.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13절)
묵상
3. 시험에 응하는 태도와 자세에 대하여 묵상.
느낀점
4. 상기 본문은 사무엘하 24장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시험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곳 역대기상에서는 ‘사탄이’ 충동(סוּת)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하에서 ‘하나님이’ 격동(סוּת)했다고 서술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서술이죠. 대체 시험은 어디서/누구에 의해서 오는 것일까요? 아래 사무엘하 24장의 본문입니다.
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사무엘하 24:1
해설
5. 폰 라트(G. von Rad)라는 구약학의 거장이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저명한 학자로 알려지기까지는 매우 획기적인 발견을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다윗의 인구조사/시험을 얘기하다가 왜 갑자기 폰 라트 얘기냐 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려면 좀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폰 라트가 성경을 읽다가 발견한 것은 이런 대목입니다.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신명기 26:1-11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특별히 5b절부터 9절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구절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립니다.
상기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로 농사해서 거둔 농작물의 첫 생산물을 바구니에 담아 하나님 제단 앞에 드리면 이 소출을 받는 제사장이 낭독하던 스트립트였다고 합니다(신 26:5b-9). 평이해보이는 이 구절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핵심 과정들 즉, 1) 족장들의 세상살이 2) 출애굽 사건 3) 가나안 땅 정착 이야기가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는 신조(Doctrine)라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신조의 발견은 위대한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신조의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땅은 어느 땅입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살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약속하던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창 12:1-6).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본토의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여정한 끝에 세겜이라는 지역 모레 상수리나무에 거처를 처음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후손은 오랫동안 기근이 들자 이집트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기근 대신 억압이 덮쳤습니다. 그러자 탈출을 통해 조상이 살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다시 귀환하기에 이릅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의 서사를 이름하여 우리가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구속사는 필연적으로 ‘땅의 약속’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가 구약성서의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폰 라트가 설명하는 도식에 따르면 창세기에서 여호수아서까지는 ‘땅 없는 자들이 땅을 차지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서 시작하여 열왕기서까지는 ‘땅을 차지했던 자들이 재차 땅을 잃어가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폰 라트가 말하는 구속사의 기본 골격입니다.
이와 같이 폰 라트가 읽어 준 대로 읽었을 때 중대한 분기점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땅을 차지하는 이야기’와 ‘땅을 잃어버리는 이야기’ 중간에 낀 책 여호수아서의 기능입니다. 폰 라트는 이를 근거로 혁명적인 학명을 하나 언급하는데 바로 육경(Hexateuch)이란 용어입니다. 여섯 두루마리라는 뜻입니다. 그 동안은 다섯 두루마리 즉, 유대인의 토라로서의 오경(Pentateuch)에만 매몰되어 왔다면, 이 오경의 프로토타입인 육경의 존재를 밝혀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시점에서, 왜, 육경이었던 두루마리들이 오경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바벨론 포로기 공동체’에 의한 정경화 작업에서 사마리아 전승에 해당하는 일체의 본문 계열은 축소되거나 제거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폰 라트의 이 위대한 발견은 저 짧은 역사 신조 중 가장 중요한 전승인 ‘시내산 전승(모세가 하나님 만난)’이 제거된 이유를 우리에게 밝혀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닙니다.
바로 앞서 우리가 읽은 상이한 본문들, 즉, 다윗의 인구조사가 문제의 화근이었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지목하고 있으면서도 그 시험의 뿌리를 누가 주도했는지 ㅡ하나님인지 사탄인지ㅡ 그 원인 부분의 진술을 달리하는 전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제2성전 재건 공동체의 본문에 의해 부활한 것이 ‘다윗의 성전신학’이었다면, 땅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ㅡ다른 말로 하면, 성전이 어떻게 붕괴되었는지ㅡ 에 주력하는 본문 속에서는 다윗을 더욱 엄격하게 다루고 있다는 차이입니다. 이런 본문의 필치를 가리켜 구약학자들은 역대기사가(열왕기 이후의 이야기를 만진 손)와 신명기사가(열왕기 이하의 이야기를 만진 손)라고 부릅니다.
신명기사가는 상기 역대기사가의 13절 진술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구하노라”를 보다 신랄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시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구하노라”
─신명기 사가의 표현
재앙은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합니다. (1) 기근 (2) 대적에게 쫓김 (3) 전염병, 이들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셋 중 1번이면 1번이고, 2번이면 2번이지, 저 말이 대체 무슨 말일까요??
다윗은 ‘우리’라는 용어로 슬쩍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1, 2, 3번 중 자기 개인이 고생하는 것은 오로지 2번 재앙뿐입니다. 어떤 고생입니까? 사울에게 쫓겨 다녔던 인생, 아들에게 쫓겨 다녔던 인생.., 그의 젊은 나날은 남에게 쫓겨 다니는 일로 세월을 다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X고생을 또 하라구? 차마 백성이 직격탄을 맞을 1번이나 3번을 직접 고르지는 못하고.., 우회적인 표현이 바로 저 문장입니다.
“…손에 빠지고 …손에 빠지지 않기를 구한다”는 이 이상한 문장, 즉 2번만은 제외시키는 교활한 문장이었던 것입니다.
시험당하는 주체를 ‘내가’에서 ‘우리’로 바꾼 셈이죠.
신명기에 보전된 이 교활함이 드러나는 문장에 비하면 역대기 본문의 문장은 보다 정직합니다. (왜? 성전 신앙, 예배 신앙의 롤 모델이기 때문에. 역대기사가에게는.)
게다가 역대기사가의 정경에서 이 예배의 창시자 다윗은 하나님이 시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까닭없이(?) 사탄의 괴롭힘을 받은 자일 따름입니다. 마치 욥 처럼(?).
하지만 육경을 가르고 지나가 ‘땅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증언에 충실한 신명기사가에게 천하의 다윗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의 대상일 뿐이며, 특히 우리의 하나님은 호된 시험도 불사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신약성서 공관복음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성령에 이끌리어(혹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Luke)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진술의 전거가 되었습니다.
결단과 적용
6. 내가 받을 시험은 내가!
기도:
7. 나― 내가 받을 시험을 내가 받는 담력을 주소서.
너― 자신이 받을 시험에 당당해지게 하소서.
우리―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소서.
※ 참고로 폰 라트의 구약학 방법론은 대단히 정경 파괴적이지만, 당시 2차 세계대전의 여파 때문에 ‘반(反) 구약성서’의 정서가 팽배해 있던 ㅡ왜, 안티 세미티즘 때문에ㅡ 독일 신학계에서 구약성서의 이 같은 본질적인 영역으로 궤도를 바꾼 것은 바로 폰 라트의 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cf. Lectionary, Monday (February 15, 2016): Psalm 17; 1 Chronicles 21:1-17; 1 John 2:1-6.
매일묵상/ 2016년 2월 15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