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는 80세가 되도록(40년 동안) 어떤 마음이었을까?
매일묵상/ 2016년 2월 12일 금요일 (어제 제2일차 분)
본문: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ㅡ사도행전 7:30-34.
관찰:
1. 사십 년이 차매 (30절)
2.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3절)
묵상:
3. 사십(40) 수를 묵상함.
느낀점:
4. 나에게 40 이라는 상징수는? 40이 찬 기점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해설:
5.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권에서 사(四) 자는 기피의 숫자다. 한국어 음가에서 그것이 죽을 사(死) 자와 일치하듯 중국어 음가에서도 ‘四’와 ‘死’는 모두 ‘sì’(쓰)라고 읽는다. 일본어로도 4(し, 시)는 ‘死’의 음가와 같다. 그래서 익히 알다시피 건물 층의 표시를 F라고 쓰고, 병원 입원실의 호수에서 4는 아예 제외 된 경우가 많다.
성서에서도 4는 마(魔)의 숫자인 듯 보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극복의 숫자였다. 특히 그것은 십 배수가 되어 공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데, 노아는 40일간 비가 내리고 나서야 거짓말쟁이가 아닌 사실이 판명되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모세의 후계구도에서 리더쉽을 선점한 것은 다른 10명과의 40일간을 정탐해서 가장 탁월한 보고를 내놨기 때문이다.
그 후계구도를 확정지은 장본인, 모세 자신도 오늘 본문에서 40이라는 의미 있는 수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그 수는 4일이나 40일이 아니라 40년이었다. 그는 일찍이 40세가 되었을 때 어떤 소명의 암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시점으로부터 40년이 더 지나가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이와 같이 무심하도다.
여기 “사십년이 차매”에서 ‘차매’(πληρόω)는 잔에 물이 차듯이 가득 찼다는 의미도 있지만, ‘반응’에 해당하는 ‘응하다’는 뜻이 강하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기다렸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응하셨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다려야 응하지.)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다 늦은 80세가 되도록 시기를 늦춤으로써 그가 완전히 포기한 상태에 이르도록 타이밍을 고른 줄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기다렸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대부분 적당히 기다리다 말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모세가 받은 그 사십 년 만에 받아낸 응답이 엄청난 파워를 지닌 지팡이 ‘득템’ 정도로 알기 십상이지만, 그것보다 선행된 진정한 응답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ㅡ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응답은 “내가 서 있는 이 땅은 더러운 땅이다!”라는 모세의 은밀한 평가를 파괴한다.
“이 땅은 거룩하다”는 하나님의 이 역설을 어이할꼬…
감히 하나님이 창조한 땅을 저주해오다니…
우리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이 저주 받은 땅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40년 만의 응답이었다.
결단과 적용:
6. 내가 40세가 되었을 즈음에 세속의 일을 완전히 접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셨으며, 나의 첫 목사님이 80세가 되신 해에 나는 30년 만에 그를 찾아가 “목사님이 옳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다. 떨기나무는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 참고로, 창조 4일 째 되던 날에 빛과 어둠이 갈리고 낮과 밤이 생겨난다. 즉, 그 이전에도 빛이 있었고, 하늘도 있었고 땅도 있었고, 저녁과 아침이 다 있었지만 어두웠던 것이다. 모세의 떨기나무에서 본 빛은 이 빛에 상응하는 것이다.
기도:
7. 나― 기다리게 하소서.
너― 기다림을 잊지 않기를.
우리― 땅을 거룩하게 여기기를.
※ 4또는 40과 같은 게마트리아(gematria)는 어떤 실제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수비(數秘)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미신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과 기호다. 왜냐하면 40세가 아직 아닌 모든 사람에게 40은 (어떤 의미로든)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호일 것이며, 그의 배수인 80세까지 그는 사실상의 앞서 체험했던 그 죽음의 잔여를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바로 그 때 나타나셨다는 것이 이 위대한 경전, 토라의 출발점인 셈이다.
cf. Lectionary, Thursday (February 11, 2016): Psalm 91:1-2, 9-16; Exodus 5:10-23; Acts 7:3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