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변모, 변형, 변태
변모, 변태, 변형은 모두 겉모습이나 모양이 달라졌다는 뜻에서 그 차이를 분간하기 어려운 어휘지만, 그 중 변태의 <태>는 맵시를 뜻하는 말로 어떤 정지된 형식을 넘어 그 사물이 지닌 불확실한 형상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 즉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산상 대화를 하실 때의 신체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다.
씨앗이 각종 채소나 열매 나무가 될 때, 애벌레가 전혀 다른 모습인 성충이 될 때, 그리고 사계절이 바뀔 때에도 우리는 그들이 지닌 태의 변화를 감지하지만 특별히 곤충이 알에서 부화해 성충이 되기까지 과정은 아예 학명으로서 메타모르포시스라 부른다. 또한 이들이 변하는 과정을 완전변태와 불완전변태로 나누는데, 말 그대로 유충에서 성충으로 완전하게 변하는 것을 완전변태, 완전히 변하지 않는 것을 불완전변태라 설명하지만 우리 일반인이 여러 종의 곤충을 보고 그런 구별을 하기는 사실 어렵다.
불완전변태를 유충 때와 성충 때 모습이 비슷한 경우라고 한다면, 그러면 유충과 성충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날개가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한다. 성충이 되면 날개가 완전히 자라서 날수 있는 모습을 갖추지만 유충 때는 날개가 없는 형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날개란 그들 변화의 핵심 형상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유충에서 성충으로 단지 그냥 날개만 자라난 것을 대개 불완전변태라고 부르고, 반드시 번데기 과정을 거치는 변화를 완전한 메타모르포시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프린서플 | 미래가 드러나는 방식
모세, 엘리야와 만나는 예수님이 변모 하시는 장면은 마가복음 9장2절과 마태복음 17장2절에도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그 장면을 바로 메타모르포시스를 써가며 묘사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에서는 그 단어를 회피합니다. 단지 달라졌다고(be altered)만 말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우선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해 선교 목적으로 저술된 책이니 만큼 그 변모를 당시 이방인들의 신화적 개념으로 오해할까봐서 이 메타모르포시스라는 말을 피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Neirynck).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신체와는 별개로 변모된 겉옷의 변화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더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옷이 광채 때문에 희어졌지만(마태복음에서는 빛처럼 희어짐), 누가복음에서는 옷이 희어졌기 때문에 광채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 간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입은 옷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은 변화입니다. 선천적으로 깨끗한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상태로부터 달라진 사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를 자칫 겉은 더러워도 속만 깨끗하면 된다는 일반적인 미덕의 가치로 국한짓는 경우도 있지만 겉모습의 변화란 언제나 진정한 속모습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만 깨끗하면 겉은 아무래도 좋다’가 아니라 진정한 ‘속 변화’는 겉모습이 변하는 것을 거스를 수 없는 이치입니다.
우리가 입은 옷이 흰 것은 빛에 의한 조명 효과가 아닙니다.
본문은 확실하게 옷이 희게 변하였다고 증언 합니다. 어떤 착시에 의한 과장이나 효과가 아니라 흰색으로 완전하게 변한 나머지 비로소 광채가 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의 냉철한 관찰입니다. 또한 영광의 바른 이해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광채의 주체가 되도록 주님을 우리 안에 잘 모셔야 합니다.
우리의 변화는 느닷없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높은 산에 올라가심으로 변하셨다고만 말하고 있으나 누가복음은 기도하실 때에 그 용모가 변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수단을 통해서만 용모가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시더라도 기도를 통해서 그 용모가 변화되었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어떤 욕망을 쟁취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용모를 변화시키고 실제적으로 옷을 희게 세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에필로그 | 완전 변화와 불완전 변화의 차이
우리는 믿음을 만능의 수단으로 전락시켜 어떠한 에너지도 들이지 않고 변화를 시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불완전 변화일 뿐입니다. 날개만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번데기와 같은 과정은 가만히 시간만 때우고 있는 과정이 결코 아닙니다. 그 자신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투입해 변화를 꾀하는 과정입니다. 완전 변화체가 되기 위한 부단한 과정인 것입니다.
기도를 바로 그러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2013.2.10. 일자분 (설교음원 파일을 추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