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점(占)
사람이 점(占)을 치는 행위는 동서양 구분없이 오랜 것이다. 별자리나 동물의 내장 형태를 보고 알아내는 서양식 점은 B.C.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 젊은층에 인기를 끄는 타로카드 점은 아시아에서 서양으로 건너간 것이다. 커피가루 모양으로 보는 서양식 커피 점도 있지만 쌀이나 곡물을 던져 보는 동양식과 유사하다. 그외 어깨뼈, 새소리, 거북 등껍질을 이용한 점도 있으며, 그런 원시적 방법과는 달리 <주역>, <사주>, <토정비결> 처럼 학문적 접근을 표방하는 점술도 있다. 사주란, 사람을 집으로 비유했을 때 그의 생년월일시를 그를(그집을) 떠받치는 4개 기둥으로 간주하는 점이다. 이 네 간지로 운명을 점친다. 한편 토정 이지함이라는 사람은 사주처럼 주역에 근거하되 시(時)는 제외하고 푸는 법을 고안해냈는데 이를 토정비결이라 부른다. 어쨌든 땅에 거하는 사람이 하늘 별자리의 규칙성에 자기 운명을 엮어서 보려는 행위나, 생년월일시라는 네 개의 시간 기둥에 자기를 가두어 읽어내려는 행위나, (아니면 다른 더 원시적인 행위나,) 그간 전래된 그 모든 방식은 어떠어떠한 자연적 규칙성에 자신들 운명을 묶어 그것들이 지닌 확률과 통계에 의존해 미래를 알아내려는 행위라는 점에서 같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원시적이었든 첨단 기법이든 어떤 확고해보이는 규칙성과 자신을 일치시켜 불확실한 결과를 타당한 것으로 미리 앞당겨 보려는 욕망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성경은 점치는 자를 죽이라 명하고 있다.
프린서플 | 미래가 드러나는 방식
지난 주에는 ‘현재가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현재면 그냥 현재인 것이지 ‘드러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현재가 어차피 어떠한 형태로든 과거나 미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신앙 안에서의 바른 역사관을 통해서만 온전한 현재를 영위할 수 있다는 전거 속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과거가 가득 채워졌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며, 또 그것들이 채워지지 않는 한, 그 현재는 사실상 여전한 과거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미래가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시연한 속에서 미래가 드러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인식 속에서 결정됩니다.
두 인격이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 하려면 양 편이 서로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한 쪽에서만 알아가지고는 제대로 된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시편 71편 5-6절에서 모태(母胎)로부터 그 분을 의뢰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모태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걸까요? 단지 수사적 표현일까요? 우리의 기억력은 놀랍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회개를 할 것같으면 과거에는 전혀 죄로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까지 명백한 죄로 기억해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에 대한 회개까지 가능케 하는 기억술이자 또한 인식의 원리입니다. 원죄, 즉 모태 이전의 존재자로서까지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이 없는 원죄에 대한 회개는 거짓일 수밖에 없음의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고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셔야 하는 것인데, 다행스럽게도 그 분께서는 우리를 모태에 짓기 이전부터 아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로써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 것입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성별(聖別)을 통해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모태 이전부터 ‘알았고’, ‘거룩하게 구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게 구별했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자칫 구별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유추합니다. 구별되지 못한 미래는 과거의 연장일 따름입니다. 가령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감옥에 있는 동안 모든 사회적 이력이 정지되는 예와 같습니다. 그는 분명 살아있지만 감옥에 있는 죄수 신분인 한 사회적 시간의 진척은 전혀 되지 않는 이치입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세우심을 통해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사용할 것이라고 점을 친 것이 아니라, 선지자로 ‘확정’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 성례전과 성만찬을 통해 드러남.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미래는 성례전과 성만찬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2013.2.3. 일자분. (설교음원은 추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