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처해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죽음 앞에 처할 때 가장 큰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같지만, 실상은 삶(살아 있다는 사실) 앞에서 더 큰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처해있음”의 실체인데, 이로써 우리가 이 땅의 태생이 아님을 압니다. 그리스도가 처했던 냉담함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프롤로그 | 도마가 쓴 그리스도의 유년기 복음
그리스도는 어떻게 자라셨을까?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내셨을까? 우리의 유년시절처럼 뛰놀기도 하셨을까? 도마가 쓴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의 유년기 복음서(Infancy Gospel of Thomas)에는 정경에서 흔치않은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져 있다. 특히 이 책에는 누가도 언급하는바, 그리스도께서 12살 때 예루살렘에 갔다 일행과 떨어져 부모가 다시 찾으러 갔던 사건도 포함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책에서의 유년 그리스도는 매우 폭력적으로 묘사되다 보니 전혀 다르게 읽힌다는 사실이다. 그 한 대목을 소개해 본다.
[율법학자 안나스의 아들이 요셉과 함께 서 있다가 나뭇가지로 예수가 만들어 놓은 물웅덩이에서 물을 빼냈다. 그것을 본 예수는 화가 몹시 나서 “못된 녀석, 불경스럽고 무지스런 망나니 같으니. 물웅덩이와 물이 네게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냐.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나무처럼 마르고 뿌리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야”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즉시 몸이 말라버렸다. 예수는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말라버린 아이의 부모가 와서 그 아이를 데려가면서 아이가 생기가 없는 것을 보고 속상해 했다. “우리 애한테 이 따위 짓을 하다니 도대체 그 놈이 어떤 놈이야? 요셉, 당신이 눈으로 보았으니 다 알 거 아니오?” 그들은 요셉을 탓했다.]
베일에 싸인 그리스도의 유년기를 접할 수 있는 것같아 흥미롭지만, 이 책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다른 기록들이 모두 다 정경 안에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대로 믿고 표현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믿고 싶은 방향대로 그리스도를 표현해 놓고 믿으려는 경향성에 더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프린서플 | 정경 속의 그리스도와 위경 속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12살 때 예루살렘에 갔다가 부모를 잃어 버렸던 동일한 이 사건이 두 책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어떤 것은 정경 확정을 받은 반면 어떤 것에는 위경 판정이 내려졌다고 했을 때, 그 가름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관점은 편/저자가 그 이야기를 얼마만큼의 일관성 있는 구속사로 연결 지어나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곧잘 신약과 구약을 아우르는 개념/사조들 간의 연속성을 규명하면서 전개되어 나가지만, 심지어는 각기 다른 사건과 정황들이 예기치 않는 짝을 이루어가며 중첩되는 현상을 출몰시키기도 합니다. 정경만이 갖는 생명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2살 당시의 그 사건만 해도 더 이른 사무엘 선지자의 유년기 정황과 다음과 같이 강력한 평행을 이루고 있는 사실이 그 한 예입니다.
그들은 성소/성전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성소에 그리스도는 성전에 있었습니다. 자기 삶의 논점이 거룩한 장소에 있음을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비록 어리지만 엘리의 아들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통해 그것을 드러냈고 그리스도는 랍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즉, 하나님 말씀에 관한 이해와 관심을 통해 그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지혜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분립했고, 또 분립돼야만 했던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순종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궁극적 지혜를 반영합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랍비들과 경이로운 대화를 이어갈 정도의 월등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육친의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합니다.
그들은 부모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무엘과 그리스도는 이미 모친의 태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모친들의 기도로 준비되었다는 점에서 구속사의 일관성을 고합니다. 또 사무엘과 그리스도는 모두 나실인으로 즉, 구별되어 자랐다는 점에서도 같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두 사람 모두는 어려서 부모와 떨어져 있었다는 점도 같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유년기 경우는 며칠 동안만 뜻하지 않게 잠시 떨어져 지냈을 뿐인데 누가가 그 단조로운 사건을 갖고 사무엘과 평행하다며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누가의 놀라운 정경적 포인트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간의 뒤바뀜입니다. 사무엘은 부모의 집을 떠나 성소에서 지내야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땅의 부모와 거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냉담함 곧,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모친을 향한 반응이 지닌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企圖)를 통해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가 정경의 들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습니다.
에필로그 | 마술적 가치, 정경적 가치
자기들이 믿고 싶은 방향대로 그리스도를 표현해 놓고 믿으려는 경향성을 우리는 이단이라 부르며 그들이 만든 저작물을 위서(위경)라 부릅니다. 영지주의도 그 강력한 한 사조 중 하나입니다. 특히 Infancy Gospel of Thomas(도마의 유년기 복음)라는 이 위서는 정경 복음서들보다도 약 1-200년이나 후에 쓰인 작품으로서 위와 같은 유서 깊은 정경적 가치와는 달리 구속사와 어떠한 연관성도 맺을 수 없는 마술적 가치로만 일관하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위조된 작품임을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것은 도마의 작품이라고 볼 수도 없는 위작에 불과합니다.
* 이미지 출처:
http://snpgny.org/prayers
http://www.spiritualtravels.info/2012/03/20/being-born-again-thomas-style/
http://porkrhine.wordpress.com/tag/bible/
http://buildingcatholicfaith.blogspot.kr/2012/05/mary-losing-and-finding-child-jesu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