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듀얼리즘
원적 세계의 문제는 그것이 철학적인가, 종교적인가, 과학적인가, 아니면 그 복에 귀납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관점과 판단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어떤 이원적 양식이든 그 속에서 우리가 결부 짓는 선악의 구도와 그에 따른 양심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구도에 직면하든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선으로, 그리고 타자를 그 모든 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의인들의 세계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우리 편”에 계시다고 말합니다(시 124:2). 그 편은 바로 시온 산이요 예루살렘으로서 흔들리지 않고 영원한 세계로 받아들여졌습니다(125:1-2). 시온과 예루살렘에 준거하는 이들은 선한 자들로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이기에 선대를 받아 마땅하고, 그 신앙적 성지에 준거치 아니하는 자들은 야웨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신 이들이라고 믿었습니다(vv. 4-5).
둘째, 의인들의 행실
그 준거집단 곧 그 의인들의 행실은 세월이 흘러 규정적으로 변모합니다. 부정한 손, 씻지 아니한 손으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시장 통을 돌아다니다 올라치면 물이라도 한번 뿌려야만 뭔가 의인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막 7:4-5). 자신의 신체를 통해 영혼이 오염되었을까봐 그토록 주의를 기울일 정도이니, 자기와는 다른 사람들(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당연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 의인들이 지니고 있는 행실이었습니다.
셋째, 의인들의 세계 붕괴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대화를 통해서 “자녀들”과 “개들”로 전통 속에 자리 잡힌 두 세계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자녀 곧 유대인들 자신과, “개들”인 이방인들 세계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해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말씀을 통해 그 전통적 구속사 입장도 듣게 되지만, 아울러 우리는 “상 아래 개들로서 그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말에 대한 예수님의 인준을 통해 그 두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인준의 근거를 “이 말을 하였으니…”(막 7:29)라고 밝히심으로써 그 벽을 허물고 두 세계를 이은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c.f. 마 15:28).
에필로그 | 듀얼리즘의 해제(解除)
우리에게 명백한 듀얼리즘 세계는 “과거와 현재”뿐 입니다. 또한 그것은 “현재와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연결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그 ‘사이’의 붕괴가 예수님의 신체를 통해 이룩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그분의 몸으로 이룩된 회개를 통해서만 그 과거와 현재의 인과관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을 뿌린 자들은 재앙을 거둔다고 본문을 말합니다. 또 본문은 말합니다. 복을 받는 자는 단지 복을 4차원에 넣고 흔들어 뽑아내는 자들이 아니라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들이라고-.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기를 “개들”이라고 간주하는 그들도 포함 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