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파라클레토스는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나?’라는 주제로 작성했던 전편에 대한 속편이다. 이 글의 제목을 당초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출현 동기, ‘탄식’”이라고 지었다가 “누가는 왜 파라클레토스의 출현 장면을 방언(통역)으로 특정했나?”로 수정했다. 이 모든 심층적인 의미의 층을 더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출현 동기, ‘탄식’”이 원래의 제목임을 독자는 유의하시기 바란다.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어원
보혜사는 중국말이다. 어감 자체가 구식인데다 이단들이 이 중국말을 ‘은혜(惠)로 돕는(保) 스승(師)’이라는 식의 한자 뜻풀이로 입혀 교주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오용해서인지 요즘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이 드문 것 같다. 보혜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를 옮긴 말이다.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경에서는 ‘협조자’나 ‘보호자’로 옮기고 있고, KJV에서 ‘위로자’로 번역한 것을 NIV에서는 ‘상담자’로, 그리고 다소 학구적 역서인 NRSV는 ‘변호자’란 의미로 옮기고 있다.
보혜사의 원어인 파라클레토스가 나타나는 가장 초기 문헌은 알렉산더에게 반란을 주도하다 자살한 데모스테네스(Δημοσθένης)의 사법 연설문 Περὶ τῆς παραπρεσβείας(거짓 대사관에서)이다. 그는 이르기를 “정의와 정의에 관한 서약은 악인의 이익을 장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저지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법에 의해 소집될 때 그것은 개인적인 야망에도 기여한다.”고 말하면서 이때 ‘옹호자’의 중요성을 피력했다(19.1). 여기서 ‘옹호자’가 파라클레토스이다. 그리고 데모스테네스가 말한 파라클레토스는 자기를 옹호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이었다.
파라클레토스는 어떻게 출현했나?
앞서 언급한 전편 ‘파라클레토스는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나?’에서는 영적인 새로운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파라클레토스/성령을 새로운 생물/리바이어던에 비유해 소개했다. 땅 위에 서식했던 리바이어던이 우리 인간에게 고통과 탄식을 주던 힘센 세력이었다면, 이제 이 새 조직은 하나님의 재창조에 의해 재형된 유기체/생물이라는 취지에서이다. 그것은 마치 데모스테네스처럼 다분히 공리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파라클레토스의 본령에는 사익(私益)의 측면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속편에서는 그 점을 살펴볼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미래에 도래할 결과로 소개했던 파라클레토스의 출현이 처음 목격자 진술로 소개되는 것은 누가의 행전에서의 일이다. 그리고 그 목격자 진술로서의 첫 해석자는 베드로 사도로 되어 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14-21
이는 배움이 일천한 베드로의 입에서 이런 인준이 나왔다는 사실에 의아해 할 일이 아니라, 파라클레토스가 가져온 주된 현상을 ‘방언’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해명은 ‘방언’이 아니란 사실을 탐문할 필요가 있다.
요엘의 텍스트를 인용한 베드로의 해명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가르칠 때,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고 했던 교시와 일맥상통한다.
요엘을 인용한 베드로의 해명은 방언에 관한 변증이라기보다는 통역에 관한 변증이며, 여기서 베드로는 통역과 예언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바울이 그런 것처럼). 이는 베드로에게 임한 갑작스러운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공유하던 파라클레토스 이해에 기초한 변증임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파라클레토스의 주된 활동은 방언과 통역 또는 예언이 전부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요한의 문헌에서 예지했던 파라클레토스가 임하는 심볼을 불의 혀 같이 ‘갈라진’ 다른 언어로 특정한 것은 교의적 결정이라기보다는 누가의 창조적 상징 이해에 따른 것이다. 통역과 예언으로 동일시 되는 이 총체적 현상은 ‘기묘자’(사 9:6)로서가 아니라 ‘옹호자’로서 임한 성령을 포착한 심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이 옹호자는 어디에서/ 무엇에 근거하여/ 왜 출현하게 되었나?
파라클레토스는 왜 출현했나?
공익을 사익보다 우선하는 공리주의 기독교도들이 선호하는 만유재신론(Panentheistic/이라고 쓰고 ‘그 하나님이나 이 하나님이나’라고 읽는다) 아류에 단골로 호출당하는 텍스트는 아마도 바울의 로마서 1장일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신성이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라는 문맥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공익을 추구하는 이른바 ‘공공신학’에 딱 좋은 맥락인 까닭이다.
하지만 로마서 1장에서 공익을 위해 출발했다는 이 만유재신에 담긴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고통받다”가(8:22) 어찌하여 “우리만 양자가 되었는지”(23), 그리고 그 양자들이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어찌하여 성령까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 양자들을 위해 친히 간구하시게 된 것”(26)인지에 관해서는 공익 추구자들은 논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익’, 사적인 이익의 영역인 까닭이다.
그를 가리켜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그 양자의 마음 먹는 생각을 길잡이 하기 위해 보냈다는 대목은 그야말로 사익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롬 8:27).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이 파라클레토스로 암시된 성령의 속성을 ‘탄식’과 결부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옹호자’라는 뜻을 가진 이 독특한 용어 파라클레토스가 변화무쌍하게 등장하는 문헌은 다름 아닌 욥기이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욥기 16:2
여기서 안위자가 바로 파라클레토스이다.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욥기 21:2
여기서 ‘위로’가 또한 동종 어휘이다.
아울러 욥기에는 대단히 독특한 표현이 있는데, 이 대목이다.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
욥기 33:23
탈굼(Targum)의 저자들이 여기서 ‘해석자’를 뜻하는 말라크-멜리츠(מַלְאָ֗ךְ מֵלִ֗יץ)를 파라클레토스로 보았다는 사실은 상기와 같은 직접 어휘의 활용과 맞물려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를 위시한 초대교회가 자신들이 체험한 성령/파라클레토스의 주된 활동 영역을 통역과 예언을 동일시 하는 반경에서 찾고 있듯이, 욥은 자신의 탄식 맞은 환경의 위로를 ‘해석자’에게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왜 출현했는가?
그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탄식 맞은 개개인의 해석자로서 임한다. 이 해석 행위가 바로 위로의 구체적인 내용인 것이다.
각 사람 위에 불의 혀 같이 ‘갈라져’ 그가 출현한 것, 바로 이 장면을 누가가 특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파라클레토스의 출현 동기는 한마디로 ‘탄식’인 셈이다.
성령을 부르는 숨, 탄식. 이 사적인 행위가 언제나 그의 임재를 부추기고 격발한다.
바울이 말한 이 탄식/스테나조(στενάζω)는 구약성서 중 욥기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