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히브리어 알파벳 중 ט(테트)를 장식으로 꾸민 그림이다.
히브리어 문자를 저런 타긴(תגין, 왕관)으로 장식하는 도안은 아모라임 시대(약 AD 200-500경)에 고안된 이후 다소 조악한 해석에 응용되곤 하였다.
히브리어로 숫자 9가 바로 이 알파벳 테트(ט)인데, 픽토그램화 하여 꼬부라진 뱀으로 기호화 한 것이다. 유대교의 카발라에서는 이 ט를 이중의 의미로 여긴다.
악(惡)의 개념일 때는 꼬부라진 뱀의 형상이고, 선(善)의 개념일 때는 절하는 왕관 쓴 사람의 형상이다. 일종의 숫자를 신비화 한 것이다. 이러한 수비학은 타고난 재능이 있을 때에만 적절한 해석을 가할 수 있다.
바코드를 숫자화 해보니 다 666이 되더라, 아이폰 6의 출시일이 9월 9일이니 9와 9를 더하고 나누면 9+9=18=6+6+6=666 카더라 식 수비는 미개한 해석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면 해석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냐.
이를 테면 누가복음은 18년 동안 질병에 시달리던 여성에 관한 이야기 하나를 담고 있다. 원전에서는 ‘질환을 소유한 영’([ἦν] πνεῦμα ἔχουσα ἀσθενείας)이라 한 것을 한글성경에서는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이라 했다.
귀신 들려 앓고 꼬부라진 것이 아니라, 귀신(여기서는 귀신도 아니고 그냥 영)이 ‘앓는 것’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그런 영의 여자/ 그런 영에게 속한 여자였던 것이다. 그냥 그런 영이다.
특히 여기서 ‘앓는다’는 것은 육체의 질병이라기보다는 (마음이) 앓는 상태를 일컫는다. 병 있으면 마음도 약하고, 마음 약하면 병도 걸리기 마련이지만 질환을 뜻하는 아스테네이아(ἀσθένεια) 자체가 그런 병명이다.
이를 고쳐주는 예수를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병 고쳤다고(일했다고) 힐난하자 예수는 그것이 일(work)이 아니라 ‘풀어주는 것'(to be loosed/ λύω)이었다는 재해석을 내놓는다. 뭘 풀어줬나.
우리는 여기서 열여덟(18) 해라는 수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하필이면 18인가? 17도 아니고 19도 아니고, 헤아리기 좋게 20년 30년 단위도 아니고.
18이라는 수는 9의 갑절일 때 의미가 있다(9 + 9=18). 누가는 18이라는 수로 지정할 때, 희랍어보다는 히브리어 수비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여기서의 수비가 저 타긴(왕관) 달린 ט(테트)의 도식에 응하기 때문이다.
즉, 꼬부라지게 만드는 영.
기호와 해석의 진수는 이것이다.
아홉 수. 이 타긴 테트(ט)는 우리의 허리와 심장을 꾸부러뜨리는데 효력이 있는가, 아니면 펴는데 효력이 있는가. 이것이 그 진수의 경계를 가른다.
신천지의 카발라나 바코드/아이폰의 카발라는 사람을 꼬부라뜨려 가두는데 힘이 있다. 대개가 그렇다. 성서의 기호와 해석은 언제나 그것을 다시 편다는데 진수가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종교 영역만이 아니라 정치 집단에 의해 꼬부라진 권력의 형상으로도 나타나는데 그 영의 소유물이 된 까닭이다. 북한 권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꼬부라졌는지 펴졌는지 그것만 보라.
그리고 그런 집단을 추종하는 이념이나 정권은 또다시 그 심성이 꼬부라진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이념을 선호하는 개인 역시 그 자신이 꼬부라진 상태이지만 꼬부라진 사실을 모른다.
귀신이 들어서 앓고 꼬부라진게 아니라,
꼬부라진 영의 소유물이 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질환을 소유한 영’([ἦν] πνεῦμα ἔχουσα ἀσθενείας)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