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창상을 인하여 사람을 죽이고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하였는데, 창상(創傷)으로 번역된 페차(פֶצַע)나 상함으로 번역된 카부라(חַבּוּרָה)나 모두 비슷한 상처이다.
한자어 창상이 총검 따위의 자상을 뜻하는 말이라면 오히려 페차보다는 카부라에 더 어울리는 말이다. 즉 사람을 죽인 것은 타박상 페차 때문이고, 소년을 죽인 이유는 칼로 베인 자상(刺傷)을 뜻하는 차부라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소년의 대비는 성인 남자와 어린 아이의 명백한 대비인 것이다. 어린이를 살해한 사유가 더 세야 하지 않겠는가.
노랫말과도 같은 이 시문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는 말은 다음 절에 나오는 “가인(칠배)보다도 라멕 자신이 더 보호를 받는다(칠십칠배)”는 문장과 연하여 자만 내지는 교만의 소리로 간주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동사 하라그티(הָרַ֙גְתִּי֙)는 종종 미래적인 사운드로 들린다는 논의가 있는데 대개 과거로 번역하기 마련이다. 만약 이 하라그티가 “내가 사람을 죽였다”가 아니라 민수기 22장 33절의 “내가 벌써 너를 죽였을 것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I should have killed)에서처럼 강한 어조라면 명백한 자만과 교만의 시어로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라멕의 이 시구는 자만과 교만을 넘어 종말을 종언하는 시구임을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음 세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삶의 방식에 대한 자조이기 때문이다.
소년 예레드(יֶלֶד)는 문자적인 소년이라기보다는 아기/후손을 일컫는 말이다. 이 단어가 여기서 한 번 나오고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기 이삭이 젖 떼는 날에 관한 이야기에 나온다(창 21:8).
이것이 라멕의 함정이며 가인의 족보를 두발가인(대장장이)이 아닌 두발가인의 아비인 라멕 자신이 종언을 선언하는 이유이다.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한 셋의 족보는 라멕(노아의 아버지)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아들 노아가 다음 세계/ 새로운 세상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