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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75
    mimoon
    키 마스터

      본문:

      예레미야 31:7~14
      시편 147:12~20
      에베소서 1:3~14
      요한복음 1:(1~9), 10~18

      각 주제:

      렘 31:7-14 | “He who scattered Israel will gather them and will watch over his flock like a shepherd.”
      시 147:12-20 | “He sends his word and melts them”
      엡 1:3-14 | “He chose us in him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요 1:(1-9), 10-18 | “God the One and Only, who is at the Father’s side”

      메시지 테마: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사

      신학적 주제: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

      파라볼레:

      아버지의 카메라

      해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 구문을 국어적인 의미에서 읽는다면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나는 선택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은혜가 되고 감사를 충만케 하는 선언이 아닐 수 없지만, 이런 선언에서 가져온 논리와 이해는 언제나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일종의 레토릭이 아니라면 그것은 불가해한 영역으로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 라는 의제가 잇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이 선언 자체가 지닌 난제라기보다는 독자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맥락과 의제(내지는 교리)로서의 한계임을 알아야 한다.

      “창세 전에 선택했다”는 이 맥락을 우리 자신이 적용할 때 언제나 운명론으로 읽어내는 탓이다.

      즉 창세 전에 ‘어떻게(How)’ 택했을까?라는 논거보다는 창세 전에 선택한 그 사실 자체는 ‘무엇인가?’(What)를 탐문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를 탐문하는 흔한 논거로서 ‘칼빈의 예정론’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예정론’ 의제를 인간의 ‘선택’에 반립하는 논제로 규정하고는 대결 구도에서 논박하기를 즐긴다.
      이런 대결 구도를 통한 이해는 마치 방언과 비(非) 방언의 대결 구도와 형식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신앙적(또는 신학적) 탐문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이념에 천착한 원리이다. 조직하려 들기 때문이다.

      칼빈의 ‘예정(론)’이란 하나님의 선택의 다른 말임을 유념해야 한다.

      인간의 선택이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인간이 이름 지은 것)에 대결한다는 구도로 탐문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이란 하나님의 ‘선택’임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선택은 소중히 여기면서 어찌하여 하나님의 선택은 ‘예정’이라는 도그마에 가두려 하는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다면 하나님도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선택’의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을 긍정의 판에 올려놓아야 한다.

      사실 이런 발상은 자기 욕망의 주체이지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예정’이냐 ‘선택’이냐 허망한 대결 구도에서 공방할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택정의 원리는 어떻게(How)가 아니라 무엇인가(What)라는 의제에서 모색해야 한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이다.

      과거에 한 카메라 회사의 인상적인 CF가 우리의 주제와 꼭 맞아 소개한다.

      CF는 이런 플롯으로 전개된다.

      #1 삶의 중반기를 훌쩍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시무룩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는 언제나 시무룩하다.

      #2 그 모습을 보던 딸은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카메라를 장만한다. 아버지께 드릴 선물로 장만한 것이다.

      #3 아버지의 삶이 바뀌었다. 연신 찍어댄다. 딸이 선물한 카메라로 가족들을 연신 찍는다. 아들의 모습, 딸의 모습, 아내의 모습에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4 가족들은 모델이 되기를 거부한다. 카메라를 들이댈 때마다 도망가거나, 화를 낸다. 김장을 하던 아내는 카메라가 가까이 오자 손사래 치는 바람에 카메라에 김치 양념이 묻고 만다.

      #5 그것을 바라본 딸은 또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버지에게 카메라 렌즈를 선물하기 위해서이다.

      #6 어느새 화면은 암전이 되고 장면이 바뀐다.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듯하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비추던 화면은 아버지가 평소 근무하던 작은 공간의 책상으로 옮긴다. 아버지의 모자가 놓여 있다.

      #7 아버지는 그 아파트의 경비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책상에는 카메라가 한 대 놓여 있다.

      #8 딸은 자신이 선물한 그 카메라를 발견하고는 집어 든다. 카메라에는 모든 장면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만일 이 딸이었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카메라 또는 그 카메라에 찍힌 장면은 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지점에서 딸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자신이 선택했던 것인가? 아니면 선택을 받은 것인가?

      아버지는 모든 자녀/가족을 참으로 동등하게 그리고 동질하게 사랑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정에서 오로지 택함을 받은 것은 ‘딸’이라 할 수 있다. 그 ‘앎’의 강도가 차원을 달리하여 현저하게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딸은 자신이 선택한 것인가? 선택을 받은 것인가?
      딸이 카메라를 선물함으로 선택을 한 것 같지만, 실은 카메라에 찍힌 이미지/영상은 이미 선구조를 띤다.
      선택을 받은 것이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참으로 사랑 받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을 가리켜 ‘부르심’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설립자들은 이를 클레토스(κλητός)라고 불렀다.
      모든 인간을 하나님은 부르시는 것이다. 하지만 부르심을 모르고 죽어가는 인간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택함을 받은 존재이다.
      초기의 교회 설립자들은 이 택함을 앞서 부르심과는 다른 단계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이 택함을 에클레고마이(ἐκλέγομαι)라고 불렀다. (바울은 이를 아포리조/ἀφορίζω/구별이란 용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마태는 아예 부르심을 받은 자는 클레토이(κλητοὶ)라 칭했고, 택함을 입은 자는 에클레토이(ἐκλεκτοί)라는 술어로 명명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 22:14)라는 유명한 탄식의 말을 남겼다.

      이로써 우리는 ‘예정(론)’이란 ‘선택’의 다른 말임을 알게 된다.

      요한복음 1:18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에 나오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원어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이와 같은 택함의 선재론(선구조)을 담은 술어이다. 독생자에서 ‘자’는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그 분’이란 뜻으로 아버지와 아들이(또는 카메라를 매개로 한 아버지와 딸이) 일체가 되는 원리를 표명하는 술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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