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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키 마스터

      본문:

      창세기 1:1~5
      시편 29
      사도행전 19:1~7
      마가복음 1:4~11

      각 주제:

      창 1:1-5 |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waters..”
      시 29 | “The voice of the LORD is over the waters”
      행 19:1-7 | “Then what baptism did you receive?”
      막 1:4-11 |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메시지 테마:

      야웨의 소리가 물 위에 있다

      신학적 주제: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파라볼레:

      물세례를 성령 세례와 이원화 하는 오류에 관하여

      해설:

      칼비니스트 중에 “성령세례가 성례의 권위를 해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례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성령에 대한 체험도 전무한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높다.

      성례란 ‘성만찬과 세례’를 말한다.

      성사(Sacrament)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와 사/부제를 임명하는 행위를 포함한 7성사를 중세교회 때부터 성례로 고수한다. 개신교는 성경을 준거로 2성사로 개혁한 셈이다.

      중세교회는 이 성사를 근간으로 교권을 구축하였지만, 이 체제의 개혁과 변화는 성례에 대한 신비를 감소시키거나 제거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 중세교회의 일반 신자들의 성례 진입은 문턱이 높았지만, 개혁 이후에는 천국의 문턱 만큼이나 낮아졌기 때문이다.

      성례를 뜻하는 라틴어 사크라멘툼(Sacramentum)의 원천어가 뮈스테리온(μῠστήρῐον)으로 명명되었다는 것은 중세의 성례가 얼마나 요술처럼 가꾸고 다듬어졌는지를 가늠케 한다. 뮈스테리온은 미스테리/비밀(의 교리)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신비가 제거된 이 무미건조해진 성례의 틈새를 타고 ‘성령세례’라는 근대적 뮈스테리온 개념이 등장했다.

      이른바 물세례는 약한 것이요, 성령세례가 진짜 세례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탈신비화된 성례의 틈새를 파고든 무지한 오해에서 비롯된 교시이다.

      사도행전 19장 1-7절은
      이 성례에 관한 원형적인 초기 이해를 보전하고 있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1세기 초기 기독교인의 세례에 관한 예전적 의미, 그리고 성령세례란 개념을 알지도 못하고 있다가 그 의미를 해득하는 종합을 담은 본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만난 기독교인에게 놀라운 질문을 한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 걍 믿으면 되는 거지 무슨 성령이야? 싶었던지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습니다

      (니들이 정말로 성령이란 말도 들어본 적 없었겠냐?)

      이 반문에 대한 바울의 재질문에는 우리가 논의하려는 핵심 의제가 담겨 있다. 성령(받음)을 (물)세례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성령 받았는지 묻다가 세례로 귀결되는 이 질문에 대해 우리 시대 기독교 사회의 두 집단은 충격을 좀 받아야 한다.

      첫번 째 집단은 성례와 성령세례를 이원화 하는 집단이다. 주로 칼비니스트 중 극단적 교조주의일 것이다.

      두번 째 집단은 성례와 성령세례를 이원화 하는 또다른 집단이다. 이들은 주로 극단적 오순절파 또는 은사주의자 중 일부일 것이다.

      첫번 째 집단은 성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물세례를 마치 성령세례가 아닌 것처럼 규정한 오류를 범했다.

      둘째 집단은 성령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물세례는 일식집 스끼다시 정도로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Luke)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기독교인과 만나는 장면을
      ‘방언’ 받게 시도하는 장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바울이
      ‘성례’를 가르치는 장면으로 기록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에 따르면 다음을 유념할 것이다.

      1. 바울은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을 분리하고 있다.
      2. 이 분리는 성령의 포괄적 임재(성령의 힘으로 믿음을 시인한다는)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보다 ‘방언(및 기타등등)’을 강조하기 위한 장면도 아니다.
      3. 이 분리는 어디까지나 믿는 것과 ‘성례’의 분리이다.
      4. 이는 성령 받는 것과 (물)세례를 동일시 하는 원리로 귀결된다.

      ※ 또 이 구간이 중요한 이유는 ‘성령 받음’과 ‘(물)세례 받음’의 이 동일시함이 무엇인지까지 설명하기 때문이다.

      6. 이 구간에서는 ‘두 종류의 세례’가 소개된다.
      7. 하나는 ‘요한의 세례’, 다른 하나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이다.
      8. 에베소 기독교인은 세례의 경험이 이미 있기 때문에, 특히 그것은 회개의 세례였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뉘앙스가 행간에 드러난다.
      9. 그러나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강권하고 있다.
      10. 이것이 바로 ‘성례’요, 우리 현대에까지 전수되고 있는 ‘세례’이다.
      11.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한 것”은 결과이지 근거가 아니다. 필수적인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서 마지막장 후미에 세례와 묶어서 ‘방언(기타 등등)’을 표적으로 묶은 것은 상기와 같이 초기 기독교의 전통에 의거한 본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본에서는 어록(Jesus saying)이 아니라 하여 빠져 있기도 한 것이다.

      현대 들어 방언을 부정하고 싶은 이들이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이원화하는 조처는,
      성례전보다도 뭔가 방언 터지고 예언하고… 이런 서비스를 강조하기 위해 성령세례를 이원화하려는 이들의 무지만큼이나 무지한 조처이다.

      전자는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무지이고,
      후자는 성례전에 관한 교의학 이론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무지이다.

      마태와 누가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이 성령세례를 구별하기 위해,

      “그(예수)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즉 ‘불’세례로 대비하였지만(심판을 강조하기 위함),

      마가의 원형에서는 성령세례란 세례 요한의 세례와 구별하는 용어였을 뿐,
      ‘불’이란 표현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나(요한)는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예수)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ㅡ인 것이다.

      마태복음과는 달리 속편을 한권 더 남긴 누가는
      그 불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임했는지까지 설명하기 위하여 사도행전 2장의 방언 받는 장면을 도입하였다.

      중요한 쟁점은 이것이다.

      첫째, 개혁의 교의에 입각한 두 개의 성사(물세례와 성찬)의 신비를 은사주의로 대체하려는 은사주의자는 성례전을 격하시킨데 대해 깊이 통회하고 성례 회복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둘째, 성례의 권위를 까먹은 목회자는 조직이나 교의에 대한 해석으로 그 권위를 뒤집을 게 아니라 성령을 받으실 것을 권한다.

      성령을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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