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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키 마스터

    본문:

    사무엘상 3:1~10, (11~20)
    시편 139:1~6, 13~18
    고린도전서 6:12~20
    요한복음 1:43~51

    각 주제:

    삼상 3:1-10 | “In those days the word of the LORD was rare; there were not many visions”
    시 139:1-6 | “Before a word is on my tongue you know it completely, O LORD.”
    고전 6:12-20 | “he who unites himself with the Lord is one with him in spirit.”
    요 1:43-51 | ““You believe because I told you I saw you.”

    메시지 테마:

    이상이 잘 보이지 않는 시대

    신학적 주제:

    말씀은 보이는 것인가 들리는 것인가

    파라볼레:

    꿈에 관한 심리와 계시의 경계

    해설:

    사무엘은 신명기 역사 문집의 시작을 고하도록 위치된 인물이다. 이 인물이 문집에서 빠지더라도 맥락에 큰 지장이 없어 보이지만, 이 역사가는 그를 중요하게 취급했다. 왕조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에 왕조신학을 기치로 삼는 이 역사가에게는 중요해서 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문집의 시작은 그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사무엘이 등장하는 시대는 ‘듣기’의 시대이다. 그 이전에는 ‘보기’의 시대였지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시대로 퇴조한 시점에 그가 오로지 ‘듣기’의 능력을 통하여 망가져버린 신과의 통신망을 복원하기 때문이다.

    소년 사무엘을 심부름하는 꼬마로 데려온 엘리 사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그 시대 선지자들의 표상이다.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들이 신전의 여성을 건드리고 신에게 바칠 제물 중 맛있는 부위를 먼저 빼돌리지만, 눈에 보이는 그 행위를 눈감아 주면서 시력은 감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퇴조하는 신성한 능력은 신세대 사무엘의 신통력에 밀리기 시작한다.

    사무엘은 보는 능력은 없었지만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술을 터득했다. 다만 아직은 그 소리가 신의 음성인지 판독할 능력은 없다. 반면, 늙은 사제 엘리는 사무엘에게 들려오는 소리의 실체가 무엇인지 안다. 신의 음성인 줄 알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들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 들을 수 없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는 경험에 의해 알지만, 이제 직접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청각마저도 망가진 것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제가 사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내는 형국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었다.

    한편, 이 시기로부터 천 년 정도가 경과한 시점에 이런 보지 못하는 시대의 풍조를 이어나가 묘사한 기록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요한이다. 바로 요한복음의 저자.

    저자 요한은 시각 능력이 퇴조한 자신의 시대를 이렇게 묘사한다.

    “Come and see!”

    와서 보라! 빌립이라는 청년이 친구에게 권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친구는 회의적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 지역에 관해서는 이미 알고 있으며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풍조에 젖어 지내는 젊은이다.

    이 풍조가 그 시대의 보는 능력의 퇴조를 반영한다.

    앞서 일천 년 전의 늙은 사제는 안락함으로 시력과 청력을 상실하였다면, 일천 년 뒤의 이 젊은 신세대는 회의주의가 그의 시력을 망가뜨린 것이다.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이 젊은 청년을 먼저 본 것은 그리스도였다.

    청년이 그리스도를 먼저 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청년을 먼저 보았다는 사실이 저자 요한에게는 중요했던 것 같다.

    보지 못하는 시대가 이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보게 되는 이변이 어떻게 창출되는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리스도는 이 젊은 청년에게 ‘본 것’을 전가한다.

    젊은 청년이 “나를 어떻게 아시나이까” 라고 반문하자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본 것’을 전가한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봤다고 말하는 이 힘은 모종의 신통력이라기보다는 영상(映像)에 관한 전가의 권능이다.

    가령, 날 때부터 맹인은 꿈을 꾸더라도 비(非) 시각적인 꿈을 꾼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맹인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듣기의 경험을 통해서이다.

    보기의 능력을 상실한 이 젊은 청년은 자기 자신의 영상을 들여다 본 그리스도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돌린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왜냐하면 젊은 청년 자신만이 그리고 있던 영상을 그리스도께서 해독해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래의 영상을 들려준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마치 야곱의 사닥다리를 연상시키는 이 영상은 십자가 도상을 암시하였을 것이다.

    회의적인 마음으로 뒤덮인 이 젊은이의 망가진 시력을 격파하는 그리스도의 영상에 관한 이 도상은

    미래를 보기 두려워한 나머지 시력을 상실한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 도상이 아닐 수 없다.

    듣기와 보기의 장애물을 격파해주기보다는 도리어
    듣기와 보기를 망가뜨리는 목회자가 창궐하는 우리 시대에 깊이 숙고해야 할 장면이다.

    ※ 저자 요한은 ‘영상’의 힘으로 회의적인 나태함을 탈출하는 이 젊은 청년의 이름을 본명 바돌로매 대신 나다나엘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선조였던 다윗 왕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선지자 나단의 반대적인 충성 기호를 보았기 때문이다. 후일 전설에서 이 청년의 어트리뷰트는 자신의 벗겨진 피부 껍질이다. 살갗이 벗겨져도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다나엘을 본명으로 보는 학설은 이 기호를 무시한 데서 비롯된 오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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