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40:21~31
시편 147:1~11, 20c
고린도전서 9:16~23
마가복음 1:29~39
각 주제:
사 40:31 |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시 147:10 | “His pleasure is not in the strength of the horse, nor his delight in the legs of a man”
고전 9:19 | “I make myself a slave to everyone, to win as many as possible.”
막 1:35 | “Very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Jesus got up, left the house and went off to a solitary place, where he prayed.”
메시지 테마:
힘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
신학적 주제:
‘창조(론)’의 용도
기다리는 자/코예(קוֹיֵ֤).
파라볼레:
리바이어던의 구조와 원리.
해설:
현대인에게 창조는 과학이지만(창조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반 과학으로, 믿는 자에게는 유사 과학으로 신봉하는 경향을 보인다), 창조라는 개념이 발원할 때 그 기초는 힘의 파쇄(Spallation)에 있었다. 믿는 자의 적대적인 세력의 힘을 대상으로 한 파쇄가 아니라 믿는 자의 힘을 대상으로 한 파쇄를 말한다.
욥의 이야기는 이에 관한 주요 예증이며, 상기 이사야 본문도 이 같은 구도 안에 놓여 있다. 꺾이는 그 힘은 언제나 이 약한 자들의 힘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갈림길을 직면한다. 그 힘의 분쇄에 관한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냐, 아니면 진정한 새 창조로 입장하는 관문이냐라는 두 길이다. 그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의 원리 같아서 일회뿐인 자기 생명을 놓고 실험할 수 없는 원리를 조직한다. 지옥이 실재하는지 죽어 보일 수 없는 이치이다.
창조는 본질상 ‘새’(new) 창조이다. ‘다시’(again)가 강력하게 전제된 개념이란 뜻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개역/개역개정)
오직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새번역)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공동번역)
이들이 불쌍해서 그런지(혹은 계속되는 반복을 의식해서인지) ‘앙망하는 자’, ‘소망으로 삼는 자’, ‘믿고 바라는 자’… 불필요한 갖은 치장을 입힌 번역이 난무하지만, 카바(קָוָה)는 그냥 단지 ‘기다리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어떤 치장도 없다.
단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새 힘을 얻어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한다고 한다.
기다리는 사람이 기다리다 죽을 수도 있다.
약자의 대적이 지닌 힘이 아닌 ‘약자의 힘’을 꺾는 과정이다.
이것이 창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