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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성서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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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8 6:28 오전 #13563
성서일과 본문:
제1독서 사 50:4-9
시편 시 31:9-16 (118:1-2, 19-29─Palms)
제2독서 빌 2:5-11
복음서 막 14:1-15:47 (Mk 11:1-11 or Jn 12:12-16─Palms)각 주제:
사 50:8 | “He who vindicates me is near…”
시 31:14 | “But I trust in you, O LORD; I say, “You are my God.””
빌 2:5-11 |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막 15:43 | “Joseph of Arimathea, a prominent member of the Council, who was himself waiting for the kingdom of God, went boldly to Pilate and asked for Jesus’ body.”메시지 테마:
요셉의 톨레도트
신학적 주제:
장사(葬事)
파라볼레:
마리아와 아리마대 요셉
해설:
지금부터 ‘아리마대 요셉’을 해석할 것이다.
구약의 부활은 이집트/헬라식 부활과는 어떻게 다른가.
경제학에서 말하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처럼 성경에도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있다.
우선 최초로 기록한 손길이 있다. 두 번째로는 그것을 엮어 편찬한 손길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두 손길을 뚫고 스스로 ‘말을 하는’ 본문 자신이 있다(‘행간’, ‘문학적 홈’… 이딴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끝으로 이 모든 걸 관장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
창세기의 종장 곧 마지막 톨레도트로 접어들면서 유다와 요셉의 대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야곱의 유언에서도 드러나 있다.
12형제에 대한 야곱의 유언 가운데 유다의 그것은 아마 가장 난해한 본문일 것이다.(까닭 없이) 요셉만큼이나 분량도 많은데다 무엇보다 긍정형과 부정형이 섞여 있어 난해하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사자’나 ‘홀’은 분명 명시적 메시아 상(像)이지만, 앞에서 이미 루우벤과 시므온에게 발화된 저주의 사실적 상징에 템포를 맞출 땐, 유다에게도 다음과 같은 부정형식이 가능하다.
유다를 ‘사자’라고 한 것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짐승에게 먹혔다고 고했을 때 그 짐승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의 지팡이는 그가 다말과 약조한 부끄러움의 증표이고, 그의 나귀(ah-yeer)는 그의 악한 아들 엘(ayr)의 음가를 떠올리며, 그리고 포도즙에 적신 그의 복장은 마치 피에 적신 요셉의 겉옷을 떠올린다.
8절의 순수 축복절과 충돌하는 이 같은 상반된 입장도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에 관한 보다 명시적 언급을 제시할 수 있다. 이미 성경에 들어 있다.
바로 역대기 역사가의 언급이다.
그는 괄호 쳐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1)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돌아갔으나 기록은 말라?!
2)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으나 장자의 명문은 요셉에게 {계속} 있다?!
이 무슨 모순된 말인가? 어쩌라고ㅡ‘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즉 요셉은 명실상부 장자이지만 드러내놓고 장자로 기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역대기 시제로는 북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 입장 때문이겠지만, 그것은 더 나아가 제2성전 시대에 남겨진 자(remnant)에 대한 부정적 견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요셉의 장자권은 북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쥐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남 유다의 명칭이 (이스라엘을 못 쓰고) ‘유다’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루는 골격이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시는 정 위치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요셉이라는 인물은 위에서 역대기 역사가 스스로 자기 경향성을 자인했듯, 정경 편찬자에 의해 지워진 이름이며, 제2성전 시대에 들어와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자들에 의해 제거된 이름이었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께서 우물가에 나온 사마리아 여자(요셉의 후예)에게 이르기를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요 4:21)라고 한 것은 유다의 후손으로서 가히 도발적 수준의 발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셉이 비로소 복권 된 것이다. (참고로 요한복음에서의 대적의 명칭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시종일관 유대인[유다]이다.)
그러나 이 도발적 에피소드보다 더 놀라운 일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이다.
마침내 온 것이다. 요셉이.
아리마대라는 위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곳을 만약 ‘라마’ 이외 다른 지역으로 지목할 수 없다면, 그는 바로 실로에서 온 요셉인 셈이다.
실로(Shiloh).
“홀과 지팡이가 유다에게 있으되 ‘실로’가 오기까지”(10절)라는 예언의 진정한 성취인 셈이다.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이며, ‘실로’는 사무엘이 자란 성소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사무엘은 다윗을 캐스팅한 인물인데, 그는 바로 에브라임 지파였던 것이다.
즉, 요셉의 차자였지만 사실상 야곱에 의해 장(양)자권을 계승한 지파.-이집트의 요셉은 해골을 찾아 메고 올라가달라고 맹세시켰고(창 50:25),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메고 가는 중이다.4복음서가 이 인물을 공히 빼놓지 않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막 15:43; 마 27:57; 눅 23:51; 요 19:38).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요셉이 부여 받은 ‘계약’의 성취에 상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다/다윗의 계약이 부차적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요셉이 부여 받은 약속에 임하는 그 ‘계약’ 자신이 지니고 있는 추인하는 힘인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유다가 저질렀던 카르마 곧, 짐승에게 (살이) 먹히고 옷을 피(포도주)에 적신 동생의 수난을 대신 갚은 그리스도의 수난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최종적 보이지 않는 손길, 하나님의 손길이라 하겠다.
이 길을 통하여 비로소 ‘이방인’이 구원 받을 길도 열린 것이다.
우리는 대개 그리스도의 수난을 위해 울 때, 각자 자신의 주관적 슬픈 연상과 관련짓는 카타르시스에 익숙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잊은 이 요셉의 톨레도트를 홀로 완성키 위해 그 무덤으로 내려가셨다는, 이 같은 ‘약속’의 카타르시스를 끌어올 수만 있다면 보다 성서적이고도 우월한 카타르시스에 이를 수 있다 하겠다. 부활을 포함한 그 모든 본질은 ‘계약’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떠나서는 “울어도 못하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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