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해제 #3 약간 19금 스크립트
“…어지러웠다.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여자는 ‘아가’에 나오는 피부 빛이 검으나 아름다운 처녀 같아 보였다…나는 그제서야 악마의 올가미 때문인지 하늘의 은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움직이는 격정과 대항할 힘이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사랑이라고 이르는 것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정점에서는 백주에 악마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자체가 악마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께 했다…”
이것은 본서에 소개되고 있는《장미의 이름》의 수련수도사 아드소가 난생 처음 여성과 관계를 가지면서 그의 내면을 묘사한 대목입니다.
통속적인 것과는 별개로 이 책의 백미입니다. 왜냐하면 Umberto Eco의 번뜩이는 신학적 소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Eco도 Eco지만, 고 이윤기 선생의 번역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도승으로서 가당치 않은 죄악의 현장이지만,
에코는 이 책의 구도에서, 아니 수도원 전체 구도에서, 아니 당대 그리스도교 전체 구도 속에서 이들의 인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지를, 뒤집은 프레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드소의 스승 윌리엄 수도사의 가르침에 따르면
여성이란 “불결한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지금 막 여성을 체험하고 들어온 아드소에게는
결코 그런 피조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아드소는 잠을 청하고 있는 사부 윌리엄에게 묻습니다.
“…사랑을 해보셨나요?”
하고 묻자,
“…소크라테스 같은 성현들은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아니 아니, 그딴 게 아니고요…”
그러자 사부 윌리엄은 무슨 말 뜻인지 알아차리고는
등을 돌아누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겐 너와 같은 경험이 없(어 해줄 수 있는 말이 없)구나…그만 자거라.”
당대의 수도사 계율은
여성과의 관계뿐 아니라,
‘웃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는 사실로서
당대의 엄숙한/엄격한 도그마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수도원은 이미 부패하여
식재료를 빼돌려 젊은 여성의 성을 사고,
공공연한 동성애가 수도원에서 행해졌으며(동성애 하고는 밤마다 스스로 몸에 채찍을 가해 뉘우칩니다 그리고 또 동성애),
상부조직은 교리 싸움에 여념이 없고,
그러는 중에 농민은 수도원 쓰레기를 뒤져먹는 악순환(수도승은 농민들이 먹여살림),
이것이 당대 교회를 둘러싼 구조였습니다.
아드소가 체험한 에로스는
수도승들이 가르치는 아가페보다 불결한가?
이에 대한 답은 불결한 취급을 받던 ‘아가서’가 오랜 고심 끝에 정경에 합류되고 만 전거와 일치할 것입니다.
죄란 절대 악인가 아니면,
약정이 산출해낸 구조물인가?
그 정/반을 구하기에 앞서
이와 같은 ‘웃음’에 대한 구식 이해는
그 에로스의 현현과 함께
급격한 퇴조를 맞이 합니다.
그래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첫 챕터의 부제가
‘도그마의 퇴조’인 것입니다.
* 존경하는 고 이윤기 선생께서는 이 책의 텍스트 맛을 완전히 (카톨릭이 아닌 절간/승려들의 톤으로 번역 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모 절간을 둘러싸고 횡행하는 소문을 듣노라면 마치《장미의 이름》과 교차 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