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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키 마스터

      《몽타주》해제 #5 아리스토텔레스

      복음주의 설교자 폴 워셔(Paul Washer)의《현대 교회를 향한 10가지 기소장》에서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까는 대목이 나오는데,

      정작 그의 설교는 마치 플라톤의 윤리를 닮았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몸담은 문화 트랜드를 비판 하지만 정작 자신이 입고 있는 옷/패션은 바로 그 비판한 트랜드/유행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치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폴 워셔와 같은 경직된 이원론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은 스승 플라톤의 그것을 완접히 뒤집어 전개하는 새로움이었다.

      알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다.
      그러나 그는 17세 때 아카데메이아(플라톤 스쿨)에 들어가서 20년이나 수학했으면서도
      플라톤이 죽자마자 그곳을 떠났다.

      후계자 헤게모니에 밀린 그가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플라톤이 죽은 후 알렉산더의 스승이 되어 어느 정도 지위가 되었을 때부터 비로소 스승을 까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소중한 친구이다. 그러나 진리는 보다 소중한 친구이다.”
      ㅡ라는 말을 남긴 그가 스승을 어떻게 넘어섰느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더럽고 떨어진 것이라며 가치 없게 여긴
      그 모든 것을 가치 있게 뒤바꿔 놓았다.

      플라톤은 절대 완전한 사물/본성은 저 윗 세상에 신(들)의 권역에 있는 것으로,
      아랫 세상의 불결한(불완전) 것들은 부지런히 덕을 쌓아 저 위에 도달 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그래서 윤리적 종교적).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아랫 것들 하나 하나에는 목적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 하나가 형식을 이루어 나감으로써 저 위에 있는(있을) 질료를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플라톤 처럼 이원론이라는 점이 같고,
      목적론이라는 점에서도 같았지만,
      그 방법적 역설에서
      이 땅의 사물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를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질료/형상론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수용하고 응용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서 당대 교회에 이입된 그 개념을 엿볼 수 있다.

      그 한 예가 주님의 성만찬 기념에 대한 이해다.

      이 땅에서 행하는 성만찬 예식은 그 본질에 직결되어 그 본질을 향해 이루어나가는 것이기에,
      그 빵과 포도주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들이키는 순간 포도주는 주님의 피로 변하고,
      우리가 입에 넣는 순간 빵은 주님의 (진짜) 살로 변하는 것이다.
      왜? 그 형식이 질료에 임한 본질/목적을 이뤄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얻어지는 게 뭐냐.
      저 신성한 빵과 음료를 아무나 먹어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는 아.무.나. 집.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제 만이 행하는 <마술>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대한 오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이성의 정교한 이론,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타고난 학술에 의해 그것은 중세교회를 이끌고가는 엔진이 되었다.

      물론 ‘플라톤-어거스틴’의 (다소 무조건적) 이원론이 이미 퇴조한 가운데서
      새롭게 장착된 신형 엔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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