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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34
    mimoon
    키 마스터

      《몽타주》해제 #11. 진화론과 공산주의의 숙주

      둘째 애가 갓초딩일 무렵
      차에 태우고 가던 어느 날,
      뒷좌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이런 말을 불쑥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네요.”(뭔가를 깨달은 듯)

      백미러로 애들 보며 이렇게 말했다.
      “거울로 보잖아.”(이렇게)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자기 자신이 아니잖아.”

      ‘저런 방식의 생각을 가르쳐준 일이 없는데…’ 하며
      관념에 대한 자발적 인식에 놀랐다.

      ‘믿는다ㅡ’라는 동사 자체는 이미 관념적(철학적) 어휘다.

      그렇지만 중세에는 이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성찬예식이 마술로 전락했다고 앞서 일렀다.
      그것은 동방교회의 ICON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루터의 행위가 어디까지나
      개혁이라는 행동(praxis)을 통해서였지만
      결국 그 행위란 ‘믿는다ㅡ’라고 하는 관념의 쟁취였다. (중요)

      오로지 ‘믿는다ㅡ’ 잖는가… (sola Fide)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흘러
      데카르트는
      오로지 ‘생각하다ㅡ’(코기토 에르고 숨)
      라는 관념에 대해 천착함으로써
      ‘신’의 힘과 ‘물리’의 힘을 완전히,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여기서 태생한 ‘회의주의’라는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전 세계의 3분의 2 이상을 물들인 행동(gewalt)이 여기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회의주의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거리’(간격)라는 게 있다고 가정할 때, 그 ‘거리’란 ‘거리감’(원근감)이 만들어낸 착시라는 생각이 바로 회의주의의 출발점이다.
      실제적인 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가령,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거리감은 산출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추측이 산출한 거리(감)이지 그것이 실제적인 거리는 아니다.

      또 저 멀리 보이는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대개 그 거리를 측정한다.
      그러나 그 원근감 역시 어디까지나 우리의 절대적 기대이지, 절대적 거리는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우리 둘째 아이의 ‘볼 수 없는 나’도 일종의 회의주의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이 분명 감각한 것도 믿지 못하는 의심(과잉 이성)의 부정적 형식이 정식 학풍으로 자리를 잡았을때, 우리가 많이 들어본 이름들, 로크, 루소, 흄.., 이런 사람들과 만난다. (이 책에서 이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겨나는 문제가 무엇이냐.

      바로 인과성, 필연성이 붕괴될 조짐을 보이게 되는 문제다.

      인과성, 필연성이 붕괴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바로 이게 무너지게 생긴거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어떤 일이 생기느냐?

      관습, 전통, 유전의 중요성이 대두되는데, ㅡ 관념을 관습의 산물로 밖에는 못 설명하게 돼 ㅡ 여기서 바로 ‘진화론’이 양생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
      ‘믿음’이라고 하는 이 관념은
      그냥 (물질의) 관습/유전의 산물일 뿐이고 마는 셈이다.

      이것을 근대 유물론(의 숙주)이라고 부르며,

      다른 말로 하면,
      그 동안도 믿지 않았으나
      더욱 더 격하게 믿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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