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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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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타주》해제 #22. 망치를 든 철학자

      한 20여 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추운 어느 날 아침에 용무가 있어 선친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차가 갑자기 서버렸다.

      시간이 이른 관계로 주변에 도움을 줄 만한 카센터가 열지를 않았다.
      운전기사는 그 근방에 카센터 하는 자기 친구가 있다면서 부르겠다고 했다.
      그가 와서는 한참을 길가에서 차를 고쳤다.

      그가 차를 고치는 동안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은 운전기사는 내게 말했다.

      “저 친구가 원래 교회 전도사 하던 친구에요…”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목사나 전도사를 하다가 관두면
      지옥에 가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지옥에 안 간다고 지금은 생각이 확 바뀐 것도 아님).
      깜짝 놀라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를 보니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들이 마시는 그 연기 만큼이나 깊디 깊은 모습에,
      친구라며 옆에서 낄낄 웃고 있는 운전기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깊은 인상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도 목사였다.
      사장님 아들을 ‘작은 사장님’, ‘작은 사장님’…하고 부르듯
      그는 ‘작은 목사’, ‘작은 목사’…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니체는 목사가 되려고 대학에서 신학을 했지만 철학으로 선회하였다.

      ‘작은 목사’ 소리 들으며 자랐으니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작은 시골 기독교 가정에 갇혀 살다가 그런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니
      자기 자신을 찾았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대학에 들어가느라 시골집을 떠난 것이 화근이었던 셈이다.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말은 자기가 자기에게 붙인 칭호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예 망치로 까부수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이다.
      무엇을 까부수려고 했을까…

      그는 소크라테스 이래 형성된 형이상학의 권위와 위엄,
      특히 그 형이상학에 똬리를 틀고 앉은 기독교 교리를 까부수려 했다.

      니체가 사용한 이 방법론은 한 시대를 감당할 만한 고귀한 것이다(실제로 감당하였다).

      그럼에도 그것은 마치 마르크시즘이 개개인의 형이상학을 파괴시켜
      공산주의라는 믹서에 넣고 갈아버린 것처럼(이 책에서는 매트릭스로 비견했다)
      사람들의 영혼을 다른 측면에서 파괴한다.

      영을 피폐하게 만드는 탁효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것은 그 자신의 영혼부터 가격한다.

      자기 영혼에 관한한
      일종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효과와도 같은 것인데
      C. S. 루이스는 의외로 잘 팔렸던 이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증보판을 내는 게 어떠냐는 출판사 청을 받고는
      1961년판 서문에다가 이르기를
      “그렇게 계속 거꾸로 마음을 비틀고 있다가는 영적 경련이 온다”
      ㅡ고 토로하면서 거절한 바 있다.

      이게 정상이지.
      (니체가 정신이 붕괴되지 않았다면 자살했을 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챕터에서는 헤겔 챕터에 이어 두 번째로 자살에 관해 다룬다)

      그런데 니체가 살다간 시대와는 약 150년의 격차가 있는 이 시대 우리나라에
      새삼 이런 ‘망치 사고’가 범람하고 있다.

      그리하여 영혼들을 좀먹는 수정주의를 양산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계에 그러하다.

      이를테면, 앞뒤 안보고 두들겨대는 걸 새로운 물결이라고 부른다거나,
      이를테면, 고작 150년 전 유행한 망치 스타일을 ‘원형’(아르케)이라고 부른다거나,
      이를테면, 목사의 아들들이 미디어에 나와 개독교라고 모욕한다거나.

      이 현상이 니체에게 임했던 것처럼 대개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가정/가문에서 나타나는데,

      이런 걸 두고 프랑스어로
      쁘띠 부르주아지(petit bourgeoisie)라고 부른다.

      부르주아지도 아닌 것이 부르주아지 사고를 지닌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즉, 부득이하게 책과 지식을 접하는 가정에서 자라다보니
      지식은 좀 접했겠다, 스스로 까부순다고 까는 것이
      사실은 부르주아지의 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니체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그를 해명해주려는 상당한 마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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