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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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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타주》해제 #31.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현대 자연과학은 17세기 뉴턴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그 ‘뉴턴의 과학’에 디딤돌은 데카르트(의 관념의 발견)라고 앞서 일렀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현대 인문학에서 뉴턴과 같은 사람이다.

      그의 디딤돌이 되었던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마치 데카르트가 실존계에서 ‘관념’을 밝혀놓은 것처럼 실존계를 ‘현상(학)’으로 완전히 재구성해낸 인물이다.

      이것은 인식론에 관한한 향후 100년은 써먹을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된다.

      이 《몽타주》 연재물에서 지금까지 다뤄 온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식론의 경향성 차이였는데
      ‘인식’이란 무엇인가?

      과거에 섬기던 교회에 말썽꾸러기 꼬마가 하나 있었다.
      IQ가 떨어지는 것은 아닌데 교감이 떨어지는 애였다.
      매우 부산스럽고 묻는 말에 99% 응답률이 떨어지는 애였다.
      하루는 계단 복도에서 그 애와 마주쳤는데 여느 때처럼 인사도 않고 그 애는 부지런히 자기 갈 길을 갔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OOO야 안녕~ 어디어디 가니?”
      전혀 대답을 않고 부산스럽게 지나쳐갔다.
      다른 어른들 쟤는 원래 저런 애! 하고 그냥 놔뒀을 텐데,
      나는 애들 부모를 무서워하지 않는 무시칸 목사였기 때문에,
      “야! 너 일루와 봐!” 하고 불러세웠다.
      그러나 역시 예상대로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는 부산스럽게 자기 갈 길을 갔다.
      (어린애들은 대부분 이런 반응이지만 이 애는 그런 애들보다 훨씬 큰 애였다)
      그래서 다시 빽ㅡ 소리 질렀다.
      “일루 안 와 임마!”
      그제야 삐죽-하니 다가왔다.
      내가 부른 이유는 단 하나.
      (대다수 어른이 교감이 떨어진다고 증언한) 이 아이의 정신세계가 궁금했다.
      혼내려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그 궁금증 하나 때문에 모든 어른이 포기한 그 애를 불러 세운 것이다.
      내가 (일부러 힘주어) 노려보며 물었다.
      “너 내가 아까 말 하는 소리 들었어 못 들었어!”
      교감이 떨어지는 이 아이는 내가 소리 질렀다고 무서워하거나 그러지를 않고 무표정하게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아이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어른이 노려봐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거)
      내가 다시 재차 물었다.
      “너 내가 아까 하는 말 들었어 못 들었어!”
      그제야 멋쩍게 고개를 끄떡이며 ‘들었노라-’는 표시를 해보였다.
      그 답을 듣고서 나는
      대단히 흡족해서는 “됐써! 가~” 하고 보내주었다.

      내가 흡족했던 이유는 ‘인식’이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애 기본 교육은 즤부모가 하는 거고… 가끔 즤도 못시킨 교육을 교회에다 의뢰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다년간 통계로 볼 때 교회 보낼 때는 사람은 만들어서 보내야…)

      어른에게 인사를 할 만한 나이에도 잘 안 하는 아이들의 부모는 대개
      그 ‘인사 안 하는 행동’을 아이의 개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인식’ 즉, 아이의 의식이 죽어가고 있다는(혹은 깨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이 의식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것을 바로 인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어린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천진난만 한 이유는
      인식에 불이 안 들어왔기 때문인데,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을 전혀 인식할 줄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때가 되어 격의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 무엇이냐ㅡ
      그게 바로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여기서 이상한 사실이 있다.
      지구상의 살아있는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도 ‘죽음’을 느끼는 현상이다.

      이때 느끼는 ‘죽음’은 정확히 말해 ‘죽음’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술어인 바, ‘처해있음’이라고 표기해야 정확한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냐?
      데카르트는 이르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였는데,

      하이데거의 스승인 후설의 현상학에 따르면,
      “나는 의식할 때 의식된다”인 것이다.

      이 현상학 명제에서 ‘나’라는 존재는
      바로 ‘대상화’에 성공할 때 비로소 진정한 ‘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의식 이전의 나는 다른 ‘나’인 셈이다.
      물론 의식 이후의 나도 전혀 다른 ‘나’이다.

      * 현실 세계에서 여러 사람 접해 보면 알겠지만, 약간 싸이코 같은 사람은 대개 대상화를 조절하는 힘이 미약하다(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것도, 그리고 나는 사탄이다ㅡ라고 소리 지르는 것도, 다 대상화에 실패한 자들이 보이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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