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말에서는 두 종류의 믿음이 탑재 되어 있다.
1) 도마가 믿는 방식으로서 믿음
2) 보지 못한 자들이 믿는 형태로서 믿음
도마가 믿은 방식은 ‘봤으니까’ 믿은 그걸로 끝이다(πεπίστευκας). 그 이상의 머시기가 없다.
그러나 두 번째 것은 그 믿음이 계속되고 있다(πιστεύσαντες). 아직 열려있다. (보질 못해서?)
왜 그럴까?
희랍어의 이런 독특한 시제를 아오리스트(αόριστος)라고 부르는데,
희랍어 문법에 따르면 이 아오리스트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완료시제는 완료된 동작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아오리스트는 정해지지 않은 동작을 나타내는 단순한 과거를 뜻한다.
과거라고 하니깐 시간적 과거로서 지나갔다는 선입견이 강하지만,
본디 아오리스트라는 말은 α + όριστος 곧,
제한이 없는(without limits) 또는 정함이 없는(undefined)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아오리스트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자에게는 ‘믿음’ 그것 하나 밖엔 없기 때문에 제한을 둘 수 없는 것이다.
무제한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달리 도리가 없으니.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선호하는 믿음이다.
특히 저 구절에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는 다시금
“복이 있는 자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다” 로
다시 쓸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복이 있는 자…”
즉, 마카리오이(μακάριοι)~ 하고 부르는 톤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의 톤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복 있는 자는~”이 있다니 놀 랍다.
믿어서 복이 아니라 복이 있어 믿는 것이다.
어쨌든 도마라는 사람은,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ㅡ고 말하는 바람에 큰 봉변을 당했다가
그래도 다시 믿음을 고백해 만회하긴 한 것 같은데
여전히 그의 믿음은 이상적이지 못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