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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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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1장 1절 주석

      창조는 하나님의 일하심에만 한정되는 단어다. 무에서 유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지만(시 33:6, 히 11:3), 이 책에서의 창조는 유에서 유 곧 질서에 대한 의미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베레쉬트(태초에)라는 말이 유대인의 성서 첫 단어로 채택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단순한 시작을 넘어 기원에 대한 선포로서 그 어떤 주어보다 앞서 있되, 빛보다도 시간보다도 (심지어 하나님보다도) 앞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자적 베레쉬트는 말씀이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유대인의 의지를 반영한다. 이 개념 속에서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엔 아르케)란 말도 창출되었다. 70인역은 이미 이 말을 요 1:1에서처럼 ‘영원부터’란 뜻을 지닌 ‘엔 아르케’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래의 뜻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써 시작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켰을 것이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태고사에 관한 서술임을 암시한다. 공동번역의 경우는 이 말을 ‘한 처음에’라고 번역하였는데 여기서 ‘한’은 천지 창조의 단회성을, ‘처음’은 만물의 출발점을 각각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엘로힘(하나님)이란 말은 ‘두려워하다’(알라) 또는 ‘강하다’란 뜻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제하는 주석이 많지만 ‘엘’은 본래 고대 근동의 이교를 포함하는 신성에 관한 범용어이다. 사실 ‘두려워 할 강하고 능력 있는 자’ 또는 ‘경외해야 할 최고 존재’로서의 호칭으로는 ‘여호와’란 명칭이 더 명시적이며, ‘언약을 지키시는 분’, ‘택한 백성을 구속하시는 분’이란 의미로서 여호와가 주로 쓰였다면(출 6:3) ‘엘로힘’은 주로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인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그렇다고 하여 일부 학자의 주장처럼 ‘엘로힘’이 ‘엘로하’의 복수형인 점에 유추하여 다신론적 사상이 창세기에 반영된 것이라고 보면 큰 오해이다. 뿐만 아니라 이 복수형의 의미를 삼위일체의 조직화 된 하나님의 존재로 정의하는 것은 다신론적 규정만큼이나 맹목적인 규정이다. 여기서 엘로힘이 지닌 복수형의 의미는 하나님의 총체적 주권으로서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참된 이해이다. 이는 그분의 존귀와 장엄함을 표현하는 당대 최고의 칭호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 ― 문자적으로는 ‘하늘과 땅’ 곧 지구를 뜻하겠으나 여기서의 하늘은 지구를 넘는 범주이다. 현대 자연과학 세계관에 따른 지구의 의미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저저 시대의 지구(하늘과 땅)는 전 우주이다(2:1). 창조하시니라(바라) ― 구약에는 ‘창조하다’란 뜻의 어휘가 세 종류이다. 첫째, 무에서 유로서 신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순수한 의미의 창조가 있다. 그것이 여기에서 사용된 ‘바라’이다. 이 ‘바라’가 때로는 여러 재료를 사용해 건축하고 만드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둘째, ‘아사’이다. 이미 창조된 물질을 토대로 더 나은 사물을 만드는 일을 가리킨다. 16절, 25절, 26절에서 사용되었다. 셋째, ‘야찰’이다. ‘아사’와 비슷하지만 기존의 사물을 어떤 특정한 목적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조성하는 일을 가리킨다(2: 7, 9). 그래서 무에서 유뿐 아니라 유에서 유의 창조 곧 질서의 관장자도 하나님이라는 것이 이 창세기의 사상이다. 이렇게 하여 ‘바라’, ‘아사’, ‘야찰’은 오경 가운데 첫 책인 이 창세기 첫 장에서 그 명확한 의미에 따라 적절하게 구사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요약하면 ‘바라’는 무에서 유로서의 존재적 창조에 종사하며(1절), 생물에게 생명의 근원을 주는 행위로서 창조를(21절),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전혀 없었던 영적 존재로서의 창조는 27절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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