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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4절 주석
2장에서 4절은 다양한 학제적 견해 또는 이단들이 서식하는 구간이다. 어찌하여 4절 이 지점부터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지, 창조의 기사가 왜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지, 그 틈새가 많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현대 독자들의 눈은 장(章)과 절(節)에 고착화 되어 있기 때문에 장과 절을 흔드는 해석을 가하면 그릇된 이론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4절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는 ‘대략’이라는 말로 번역된 톨레도트(תּוֹלְדָה)이다. 이 톨레도트를 공동번역은 그냥 생략해버렸고(대신 ‘때’를 강조), 새번역에서는 ‘일’로, 개역개정판에서는 ‘내력’이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대략’이란 말보다 월등히 낫은게 아니다. 현대인에게 ‘대략’은 ‘대충’이라는 어감으로 인식되는 게 문제지만 ‘약술된 줄거리’(大略)라는 뜻을 지닌 ‘대략’은 ‘족보’라는 뜻을 가진 이 톨레도트를 잘 반영하고 있는 까닭이다. 창세기는 10개 정도의 톨레도트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창세기의 관심은 땅과 인간이기 때문에 이 첫 번째 톨레도트가 창세기의 진정한 시작일 수 있다. 이 톨레도트 이전의 기사는 그 땅과 인간이 등장하는 우주적 배경을 담은 서문(prologue)인 셈이다. 하나님의 호칭이 달라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엘로힘은 인종과 토양의 구분 없이 널리 기제된 신지식(神知識)을 포괄할 수 있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은 고유한 명칭이기 때문이다. ‘엘로힘 야웨’가 아니라 ‘야웨 엘로힘’임을 유념할 것이다. 야웨라는 신명은 인공적인 ‘음가’이다. 이 야웨(יהוה)라는 명칭은 자음으로만 전수되고 모음은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Adonai)에서 빼내어 결합시킨 음가이다. 자신들이 직접 받았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이름이 부를 수도 없는 이름의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자신들만이 그 이름을 알고 부를 수 있다는 히브리-유대인의 이기적인 특수주의이다. 둘째, 그 신성한 이름은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고귀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번째 이유가 첫 번째 이유를 격파한다.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신(ΑΓΝΩΣΤΩ ΘΕΩ)을 찾고자 탄식하기 때문이다(행 17:23; 롬 8:23). ‘야웨’와 ‘아도나이’가 합성된 이름 ‘예호와’는 영어 ‘지호바’(Jehovah)에서 우리말로 음역되면서 ‘여호와’가 되었다. 이 이름은 성경에 약 6800회가 발생하고 있다.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대략이 이러하다”에서 때는 욤(יוֹם)이다. 욤은 본래 ‘날’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전치사 브(בְּ)가 붙어서 브욤(ביום)이 되었다. 즉 ‘날’이 아닌 ‘때’가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1장의 창조 기사와 2장의 창조 기사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료설에 매몰된 학자는 분리된 그 이상을 읽지 못한다. 지력이 떨어지는 이단이 분리시켰을 때는 인간이 두 번 창조된 것으로 이해한다. ‘때’ 또는 ‘그 날에’(in the day)라는 의미로 쓰인 브욤은 1장에서의 창조 그 세부(톨레도트)에 관한 진술임을 밝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창세기의 제목은 게네시스(γένεσις)가 되었다. 게네시스는 톨레도트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이기도 하지만 “만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였다”고 했을 때 ‘종’에 해당하는 게노스(γένος)에서 온 말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