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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993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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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2장 7절 주석

      1장에서의 인간 이해는 일종의 ‘종의 기원’(‘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이었음을 앞서 일러두었다. 현대인은 대개 ‘신의 형상’이라고 하는 기원보다는 ‘원숭이의 형상’이라는 종의 기원을 더 선호하지만 그것은 현대인의 근대식 기호(嗜好)일 뿐 양자는 똑같이 믿음을 요구한다. 전자는 정신에서 물질이 비롯되었다는 믿음을, 후자는 물질에서 정신이 비롯되었다는 믿음을. 우리는 후자를 유물론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2장은 놀랍게도 이 유물론의 물(物) 사상과 어느 정도는 배치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의 재료가 흙임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1장에서 창조의 수행 대상은 땅(에레츠)이지만 2장에서는 에레츠가 아닌 흙(아다마)을 재료 삼아 하나님에 의해 직접 수행된다. 이 같은 차이를 가르는 동사의 운용은 실로 정교하다. 바라(בָּרָא)와 아사(עָשָׂה). 이 두 동사를 어떻게 구별해 전개하는지 살펴보면 이렇다. 우선 ‘바라’동사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바라]하셨다(1:1). 물고기, 생물, 조류를 종류대로 창조[바라]하셨다(1:21).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바라]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바라]하셨다(1:27). 다음은 ‘아사’ 동사이다. 하나님이 궁창이 나뉘라[아사] 하셨다(1:7). 하나님이 땅은 풀과 씨 맺는[아사]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아사] 과목을 내라 하셨다(1:11, 12).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시고[아사] 별들도 만드셨다(1:16).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아사] 하셨다(1:26). 하나님이 그 지으신[아사]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1장에서만 보더라도 이 두 동사의 역할이 다름이 확연하다. 바라 동사는 형성되는(form) 것이다. 그에 비하면 아사 동사는 빚는(fashion) 것이다. 하늘과 땅이 갈라진[바라]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에서 인간은 갈라진/분여된[바라] 것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은 분명하게 갈라진[바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섞이면 안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에 비하면 아사는 ‘맺힌’ 것들이다. 식물의 씨가 맺히고[아사], 광명이 맺히고[아사], 그리고 사람을 빚었다[아사]. 1장과 2장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한 것은 2장이 이 동사 전개의 종합인 까닭이다. 2장 2절에서는 지으신[아사/ 빚은] 일을 마친 일곱째 날이라고 마무리한다. 2장 3절에서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 창조[바라/form]하시면서 만드신[아사/fashion] 일을 마치고 안식하였다고 분명하게 의식하고 구별해 쓰고 있는 것이다. 4절에서 다시 한번 반복해 구별한다. “…창조하신 때에…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창조[바라]하신 때에 창조[아사]하신 대략이 이러하다”는 문장이다. 18절에 가서는 아담의 돕는 배필을 빚으신다[아사]. 특히 2장에서는 ‘빚는다’는 이 아사 동사를 보조하는 동사 하나가 새롭게 등장한다. 야차르 동사이다. 바로 이곳 7절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에서 ‘짓다’가 ‘빚다’는 동사인 야차르이다. 각종 들짐승가 새를 ‘빚는다’[야차르]. 왜 야차르라는 동사가 보조로 필요한지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1장에서 아사는 바라의 운율에 맞추어 땅(에레츠)이 내는 활동에 어느 정도 귀속되지만 여기 2장에서는 보다 명확하게 흙(아다마)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토기장이처럼 빚는[야차르] 것이기 때문이다. 1장에서의 사람(남자)과 2장에서의 사람(남자) 간에는 강력한 차이가 있다. 이 남자가 1장에서는 다른 모든 동물처럼 생령(네페쉬 하야)이 되었지만, 반면 2장에서는 생물(네페쉬 하야)을 흙으로 빚되 그 사람에게 한 것처럼 (똑같이) 흙으로 빚었노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무슨 차이인가. 1장에서는 동물들처럼 영혼이 된 것이지만, 2장에서는 동물들이 인간처럼 흙에서 비롯된 사실이 강조되는 차이이다. 네페쉬 하야의 이같은 동질성을 ‘생령’(living soul)과 ‘생물’(living creature)로 번역한 것은 의역이라기보다는 오역에 가까운 행위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은 동등하고 같다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성) 간의 강력한 차이는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코에 불어넣은 ‘생기’를 통해 구별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것이다. 이 생기 네샤마는 오로지 인간에게만 부여된 하나님의 호흡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 권할 때, 창세기의 네샤마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호흡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호흡/파라클레토스임을 이 창세기 2장 7절에 대한 미드라쉬로 해석하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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