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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997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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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2장 9절 주석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1) ‘나무’(에츠[단수임] עֵ֛ץ)를 나게 하셨는데 2) 그 나무란 [종류별] 온갖(כָּל) 나무이며 3) 그 나무들 속성이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았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먼저 가져야 한다. ‘나무가 먹는 것인가?’ 여기서 기술된 ‘나무’는 ‘열매를 잉태하는 나무’(에츠 오세 페리)이다. 흔히 현대인은 아담의 아내 하와가 ‘열매’를 보고 관상(觀賞)의 즐거움을 느낀 줄 알지만 그것은 현대인의 관념에 따른 착시일 뿐이다. 열매가 아니라 열매를 ‘잉태하는 나무’(에츠 오세 페리)를 보고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이 관조의 형식은 3장 6절에서도 재차 확인된다. 열매가 아닌 ‘나무’를 보고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그러므로 인간 최초의 죄악인 탐욕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 탐심의 충동을 격발시킨 탐미의 대상은 열매가 지닌 관능미가 아니라 나무에 맺히는(잉태되는) 현상의 관능미였기 때문이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가리켜 아예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 맺는” 나무라고 번역한 공동번역은 창조 본래의 미(美)를 훼손한 대표적인 예시이다. 아름다운( 타바 תַּאֲוָה) 것과 좋은(토브 ט֣וֹב) 것은 각각 ‘보는 것’과 ‘먹는 것’에 대한 수식임에도 아예 나무에 대한 기능성으로 부착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3장에서 타락을 목전에 둔 인간 역시 ‘보암직하고 먹음직한’(3:6) 기능성으로 아름다움을 부패시킨 것과 일치한다. 여기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상반된 상징성에 유의할 것이다. 하나는 영속성이며 다른 하나는 단절성으로, 생명은 나무 자체이지만 선악은 나무의 기능성이 아닌, ‘아는 것’이 잉태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빚어진(아사) 그 자체만으로 일체의 금제 없이 얼마든지 생명을 구가할 수 있(었)음에도 생각지도 못한 다른 것을 ‘잉태’하는 방식으로 생명을 꾀하고 그 영속성을 추구한다. 발상 자체가 타락이요 부패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름답고’(타라)와 ‘좋게’(토브) 창조된 것들이 관능의 대상을 경유해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개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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