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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034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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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3장 1절 주석

      뱀으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세 가지가 있다. 창세기에서 처음 언급되는 나카쉬(נָחָשׁ)와 함께 ‘사라프’, ‘탄닌’이 있다. 나카쉬가 파충류로서 뱀을 통칭한다면(사 27:1; 렘 8:17; 미 7:17), 사라프(שָׂרָף)는 사나움이 강조된 뱀이다. ‘불뱀’ 또는 ‘날아다니는 불뱀’으로 번역되었다(민 21:8; 사 30:6). 탄닌(תַּנִּין)은 큰 뱀이다. 바다 괴물 또는 용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욥 7:12; 시 74:13; 사 27:1; 렘 51:34; cf. 출 7:9 ; 신 32:33). 창세기에서 부정적인 악의 발생이 거론되면서 그 기원에 왜 뱀이 놓이게 되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뱀을 악으로 간주하는 데 동의하지만 그것이 왜 악인지에 대해서는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빨간 색은 악하다’는 식으로, ‘6월 6일 6시에 태어나면 악마다’라는 식으로, 맹목적인 악의 기호를 뱀에게 뒤집어씌우지만 무지한 것이다. 기호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만약 온 몸에 뱀의 문신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선한 영향력은 아니다. 하지만 각종 의료 기구(機構)에 지팡이에 뱀이 타고 오르는 심볼은 악한 기운이 아니다.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다”(시 23:32)라는 말도 있지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언명은 어찌할 것인가? 나무에 뱀이 달린 도상은 고대로부터 유서 깊은 치유의 상징이다. 헬레니즘 문화에서는 이를 치유의 지팡이라 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Ασκληπιός)의 지팡이가 대표적인 예다. 신화에 따르면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과 코로니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생모 코로니스가 그를 임신한 상태에서 죽은 것을 아버지 아폴론이 꺼내서 살렸고, 어릴 때부터 의술을 연마하여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대개 그 지방 병원 역할을 하였는데 지팡이에 뱀이 휘감고 올라가는 도상이 그의 상징이 된 것이다(참조 그림 4, 5).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제자이다. 그렇지만 어찌하여 하필 이 혐오스런 뱀이 치료의 기호가 되었는지는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한다. 우선 널리 알려진 보편 기호에 따르면 뱀은 죽음의 상징이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버지인 아폴론 자신이 이미 의술의 신으로서 어린 나이에 죽음의 상징인 뱀 퓌톤(πύθων)을 무찔러 죽였다. 아폴론을 퓌티온이라 부르는 것은 ‘뱀(퓌톤)을 죽인 자’라는 뜻으로서 ‘죽음을 정복한 자’라는 의미에서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헤라클레스는 태어나서 9일 만에 뱀 두 마리를 찢어 죽였다. 그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는 머리가 아홉 달린 뱀 휘드라를 파괴함으로써 ‘헤라클레스 칼리니코스’(Ήρακλης Καλλίνικος)라는 칭호를 얻었다. ‘죽음에서 빛나는 승리자’라는 뜻이다. 뱀은 죽음뿐 아니라 되살아남의 상징이기도 하다. 폴뤼도스라는 인물은 징역형을 받고 돌로 된 감방에 갇혔는데, 어느날 뱀이 자기 몸뚱이에 약초를 문질러 죽은 암컷을 되살리는 놀라운 광경을 본다. 다음 날, 왕자가 뱀에 물려죽었다는 소문이 감옥 안으로 들려왔다. 왕자를 살려낸 자에게는 상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뱀이 쓰다 남은 약초를 가지고서 왕자를 살려내고 자신도 돌 감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석실 자체가 뱀의 뱃속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구약성서에서 요나는 커다란 물고기에 갇히는데 유대 카발라 상징에 의하면 큰 물고기와 거대한 뱀은 호환 기호이다. 요나가 큰 물고기 또는 뱀의 뱃속에서 나온 것처럼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도 거대한 뱀의 뱃속에 들어갔다 사흘 만에 나온다. 헤라클레스도 거대한 뱀이 삼키는 바람에 그 뱃속에 들어가 있다가 사흘 만에 그 뱀의 배를 가르고 나온다. 그렇다면 모세가 야웨 하나님의 명을 받고 나무에 건 뱀은 신화적 각본이란 말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뱀은 큰 물고기와의 호환 기호일 뿐 아니라, 용(옛뱀) 또는 리워야단과의 혼용 기호다. 리워야단(Leviathan) 곧, 인간의 능력으로 핸들링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권력일 수도 있고, 기분 좋은 문화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다. 심지어 기독교 내지는 기독교 내의 어떤 교회일 수도 있다. 그 자신이 집합 생물인 동시에 세력이다. 그러므로 리워야단일 때 이 뱀의 기호는 그야말로 모든 상징세계를 아우르는 상징의 총화이다. 우주의 천체와 시간의 순환 구조를 그 뱀의 긴 몸통이 써클을 휘감은 형상으로서 조디악(12간지, 12별자리)을 형성한다. 자신의 꼬리를 입으로 문 그 형상은 365일 혹은 12시간 순환의 고리인 것이며 누구도 이 써클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시간성은 진보일 수도, 퇴보일 수도 있다. (7번 이미지 참조) 가령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쟈르의 꿈을 꺼내어 들여다보았을 때, 금, 은, 동, 철의 연쇄를 세계국가 또는 세계 권력으로 해석했는데, 황금에서 철까지의 진보는 사실상 역사의 퇴행을 표지한다. 금은 최고의 가치이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 종교를 아우르는 최고의 가치이다. 은은 금 대신에 존재한다. 금을 얻으려다 산출한 금속인 것이다. 동은 은을 대신한다. 그것은 은금을 얻으려다 산출한 금속인 것이다. 철은 가장 하위의 금속이다. 그러나 철은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결국 철이라는 금속은 금을 얻고자 했던 연금술에 무수한 시간을 쏟아 부은 후에야 터득할 수 있었던 기술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시간)의 퇴행이자, 물질(세속성)의 진정한 권능이 되었다. 왜냐하면 금을 만드는 연금술로 획득한 철은 금을 빼앗는 무기로 탁월하였기 때문이다. 황금의 속성이 철에 들러붙은 것이다. 모세가 나무에 뱀을 매다는 장면의 다이얼로그는 바로 이 시간 퇴행의 금속사(史)를 잘 반영한 텍스트이다. (Cf. 민수기 21) 우리말 성경에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것이 불뱀이며, 불뱀에 물려죽자 모세가 취한 처치가 놋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것은 분명 ‘하네카쉼 하세라핌’(הַנְּחָשִׁ֣ים הַשְּׂרָפִים)이었다. 불뱀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세라핌은 천사의 호칭에도 사용된ㅡ‘그룹과 스랍’할 때의 스랍ㅡ다. 세라핌이 타들어 가는 듯한 맹독을 뜻하기에 불(뱀)으로 번역된 것이다. 하지만 백성은 자신을 물어 뜯은 존재를 단지 ‘뱀’으로만 알고 있다. 하나님이 보낸 것은 ‘하네카쉼 하세라핌’(그 맹독의 그 뱀/불뱀)인데도, 그들이 모세에게 부탁해서 쫓아내달라 한 것은 ‘하나카쉬’(הַנָּחָשׁ) 즉, 단순 뱀이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을 문 뱀이 단순한 뱀인 줄로 아는 것이다. 무슨 차이일까ㅡ 하나님께서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한 것은 시종일관 세라핌(שָׂרָף)이다. 앞서 ‘불뱀’(하네카쉼 하세라핌)을 보냈다고 했는데 모세에게 매달아 내걸라고 한 것은 나카쉬가 빠진 ‘세라핌’이다. 나카쉬(뱀)보다 중요한 것은 ‘세라핌’(불)인가? 그렇다. 하나님은 영적인 지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백성은 자신들이 뭐에 물어뜯긴지도 모른다. 영적으로 무지하다. 세라핌(스랍)에 물려뜯기고도 나카쉬(단순 뱀)에 물린 줄로 아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사회주의에 영혼이 잠식된 자들처럼. 이때 의미를 알아차린 것은 오로지 모세뿐이다. 불뱀(세라핌)을 내걸라 하였을 때, 바로 ‘나카쉬 네호쉐트’ 곧 놋뱀(נְחַ֣שׁ נְחֹשֶׁת)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라핌도 아니고 단순 나카쉬도 아닌, 나카쉬 네호쉐트(נְחַ֣שׁ נְחֹשֶׁת) 즉, 놋은 무엇이던가? 그것은 바로 금에서 철로 퇴행하는 과정에서의 진정한 무기의 발호 지점인 (청)동기로서의 기호, 즉 세속과 문화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놋뱀은 어떤 마술이 아니라, 모세의 탁월한 이해를 반영한다. 우리가 장대에 걸고 저격해야 할 것은 바로 놋, 거대한 현세의 리워야단이었던 것이다. 이 놋뱀, ‘네호쉐트’가 훗날의 리워야단인 ‘느후스단’이 되는 것이다. 이 리워야단이야말로 지식/지혜의 상징으로서 에덴의 지식 나무를 기어 올라갔던 바로 그 놋뱀인 것이다. 종말에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지식나무 곁에 있던 생명나무로 올라가 달리었다. 요한복음은 이것이 ‘들림’(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곧 휴거의 의미라 지적하였다. 현대적 종말론자들이 이 놋뱀의 의미에 무지한 나머지 휴거를 거의 우주선의 자기장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격상된 이해이다. 끝으로, 불뱀은 어떤 때에 물리게 되었던가. 그것은 광야, 곧 자신의 길로 (지정된 운명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였을 때였다.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이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린 일용할 양식을 가리켜서도 “이 하찮은 음식이라” 하였다. 바로 이때, 현재의 자기 밥그릇을 하찮게 여기는 바로 그때, 문화 불뱀 느후스단이 우리에게 스며들어 영혼을 물어뜯고 좀 먹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여자에게 묻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말의 원문은 “먹지 말라 한 것이 사실이냐?”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단 한 가지를 제외한 사실상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어라!”고 명했지만, 이 지식에 능한 화신은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는 반명제를 통해 그 언명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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