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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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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3장 4절 주석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정녕 죽으리라(2:17)고 했던 하나님 명제에 대한 반 명제이다. 매우 강력하다. 앞서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2:16)에 대한 반문(“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이 이끌어낸 결과다. 어순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모트 타무트(מות תמ/ 죽음이 죽으리라)에 부정을 뜻하는 לֹֽא(로)가 붙었을 따름이다. 악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가장 밀접하면서도 친근한 유사(like)인 것을 대개 뿔이 달린 형상화를 통해 멀리 거하는 존재로 밀쳐낸다. 그렇다면 “죽으리라”는 명제와 “죽지 아니하리라”는 반명제가 부딪쳐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이 되었는가. 이것이 이 본문의 핵심 주제라 할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영이 죽었다고 말함으로 당장에 죽지 않고 전개되는 아담의 역사를 변증하고, 어떤 이는 수명이 짧아졌다는 논설을 통해 역시 아담의 죽지 않았던 현세를 옹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과 옹호적 논증은 대부분 이원론에 기초한다. 아담을 영과 육으로 분리해버리는 것이다. 히브리인에게 있어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육체로 가장 널리 쓰인 말은 ‘바사르’(בּשׂר)이다. 그리고 영적인 존재로 쓰는 말이 ‘네페쉬’(נפשׁ)이다. 창세기에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는 플롯에서 봤다시피, 아담을 ‘사람이다!’라고 하였을 때, 그는 바사르와 네페쉬를 합친 것이지 영혼만을 지목하거나 신체만을 지목해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다. 가령 욥기에 나오는 문장 중에 바사르 이쉬(בְּשַׂר־אִֽישׁ)는 ‘살로 된 사람’을 강조하는 말이지 ‘사람의 몸’을 특정하는 강조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생들의 영이 다 그분 손안에 있다”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사람의 몸’을 지목한다기보다는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지목하는 것이다. 히브리적인 관념 속에서 인간은 ‘몸으로 변한 혼’(Incarnated Soul)이 아니라 언제나 ‘산 몸’(animated body)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사람이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곧 몸이었던 것이다. 인생들의 영에서 ‘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루아흐이다. 즉 바람. 그리스도께서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표명한 바 있다. 인생들의 영이라 함은 유령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산몸으로 된 삶의 흐름을 말한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죽은 것은 영이 죽거나 몸이 죽거나 갈리는 게 아니라 존재가 죽은 것이다. 그 삶이 죽은 것이다. 죽음을 뜻하는 무트(מוּת)를 지나치게 신학화한 나머지 육체적 죽음과 영의 죽음으로 이원화하는 식의 설명이 우리 주위에 차고 넘치지만, 굳이 그런 형이상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망했다’라는 무트의 손쉬운 의미는 그 모든 죽음을 소급한다. 아담과 그의 가정이 이제 망하는 바로 그 길목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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