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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9절 주석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였을 때 아담을 ‘부르시는’ 것과 ‘이르시는’ 것은 각각 다른 말이다. 부르시는 행위 카라(קָרָא)는 빛을 낮이라 칭하고(1:5)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고(1:8) 뭍을 땅이라 칭하였을(1:10) 때의 ‘칭하다’이다. 이 ‘카라’의 힘은 곧바로 아담에게 이양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들짐승과 각종 새를 아담이 어떻게 이름 짓나 보시는 관찰 속에서 아담의 작명(作名) 행위로 나타난다. (이름을) ‘짓다’가 바로 카라이다(2:19).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고 하였을 때 ‘일컫다’도 역시 카라이다(2:19). 이것이 ‘부르는’ 행위이다.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존재론적 질문인 셈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고 이르는 말은 “빛이 있으라”고 일렀던 말과 똑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르는’ 행위 아마르(אָמַר)이다. 그러나 “네가 어디 있느냐”는 존재론적인 질의를 ‘실존’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입혀 이해하려는 부류가 많다. 유감스럽게도 이 고대의 문헌은 그러한 근대적 의미를 지지하지 않는다. 근대적 실존은 다분히 스스로 존재하는 단독성을 띠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담의 존재를 탐문하는 물음(“네가 어디 있느냐”)은 오히려 단독성과는 상반된 동반자적 관계(partnership)에 대한 질의이다. 앞의 8절은 이 물음의 배후를 밝혀주고 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3:8)에서 할라크(הָלַךְ) 동사의 히트파엘 분사형인 “거닐다”(walking)라는 말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나님의 일상성을 표지한다. 동반자가 사라져 안 보일 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물음은 상식이 아니던가? ‘날이 서늘할 때’(산들 바람이 불 때)라는 표현들은 에덴동산이 갖는 일상성을 극대화하는 표현들이다. 훗날 이 할라크 동사는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레 26:12, ‘행하여’)이라는 레위기 제사법 속에서,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신 23:14)이라는 신명기 법전 속에서, 그리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다’”(삼하 7:6)는 다윗과의 계약 속에서 유서 깊은 신앙의 형식이 되었다. 또한 이 할라크 동사의 일상성은 후기 유대교에 있어서 흔히 613계명으로 알려진 유권해석집과 함께 탈무드법, 랍비법, 관습과 전통을 포함한 유대교 종교법의 명칭인 ‘할라카’(הֲלָכָה)의 유래가 되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성문화된 이 할라카는 할라카의 당초 본질인 일상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존재적 질문에 직면하기도 한다. 죄를 안 지으려고 하면 할 수록 죄에 직면하는 관성의 원리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러니까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원죄에 관한 신문(訊問)의 전형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