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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10절 주석
“원죄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원죄=선악과’라는 도식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처럼 학습된 관념으로서 원죄는 인본주의가 창궐할수록 ‘교리적인 죄’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원죄는 이레니우스(Irenius)와 같은 교부들의 해석이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한 표준화 된 설(設) 정도로 여기는 신학자도 많다. 헤겔 좌파를 능가하는 이들 한국식 좌파 기독교는 더 이상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를 연 것이다. 이는 ‘원죄=선악과’라는 도식의 오인에 기인한다. 선악과를 먹은 적 없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관념 속에만 있는 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서 본문 속에서의 원죄란 ‘원죄=선악과’가 아니라 ‘원죄=벌거벗음’이다. 벌거벗은 상태가 ‘죄의 원형’이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물음에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는 아담의 이 답변은 이 죄 형식을 탐문하는 데 있어 중심축에 해당하는 본문이다. 아담의 인식 속에서 두려움의 실체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벌거벗음’이며, 또 이 답변에 대한 하나님의 반문 역시 선악과보다는 ‘벌거벗음’을 하자(瑕疵)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 의식 속에서 죄란 벌거벗음이다. 선악과를 먹은 사실은 부차적 인식에 불과하다. ‘선악과’란 말 자체도 틀린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다. ‘그 나무’ 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정확한 명칭이다. 국문에서 이 조어의 고착이 더 심하여 ‘알게 하는 나무’라는 본말은 제거하고 마치 ‘악하게 만드는 나무’로 원죄의 기원을 그 나무가 지닌 어떤 성질과 효능처럼 만들어 버렸다. 아담은 처음으로 죄를 ‘알도록 만든’ 첫 사람이지 죄가 원래에는 없다가 죄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죄란 알게 되는 것이지 창조되고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최초의(에덴의) 상태를 무결성 상태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최초의 무결성이란 하나님과 산들바람을 거니는 동행 속에 보장된 ‘오직 은혜’(sola gratia)였지 하나님이 배제된 피조계가 무결한 것은 아니다. 창조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이것이 ‘죄’의 근본 개념이다. 이런 죄가 아니라면 살인자나 흉악범만 지옥에 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죄 개념에 근거하여 바울은 죄가 세상에 “에이세르코마이(εισέρχομαι) 했다”라는 표현을 썼다(롬 5:12). 죄가 창조된 게 아니라 ‘들어왔다’는 어정쩡한 표현이다. 원죄, ‘벌거벗음’, 즉 이 ‘하자’를 가리켜 하마르티아(αμαρτία)라 부른다. 허물 내지 결함이란 뜻이다. 인간은 언제나 벌거벗음을 가릴 수 없는 생래적 원죄자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지나간 ‘그 나이’에 들어서야 아버지를 ‘안다.’ 딸은 어머니가 지나간 그 나이에 들어서야 어머니를 ‘안다.’ 다시 말해서 이 하마르티아의 실체는 ‘몰랐던’인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음이 두려워…” 즉 하나님의 소리를 ‘솨마(שָׁמַע, 들었을)’ 때만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벌거벗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전에는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