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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22절 주석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에서 ‘보라’(behold)로 번역된 헨(הֵן)은 놀람과 당혹감을 표현하는 감탄사의 전형이다. 이 감탄사를 중심으로 우리는 두 가지 심각한 질문에 봉착한다.
첫째, 야웨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발생할 줄 전혀 몰랐던 것만 같다. 둘째, 하나님의 당혹감을 자아낸 ‘선악을 아는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선 이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인 ‘전지’(Omniscient)와 ‘전능’(Omnipotent)에 관한 의구심에 봉착하게 만든다. 전지는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이고, 전능은 능치 못한 일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으셨나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아담이 그 열매를 먹을 줄 모르셨나요?” 이러한 의문의 연쇄는 결국 ‘헨’을 중심으로 한 이 놀람과 당혹감을 극화(劇化)한다. 전지적 작가인 신이 모든 것을 짰다는 이론이다. 극을 조직(systematic)했다는 것이다.
이런 치명적 오해는 극(劇)이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퇴락한 비극 이해의 단적인 한계이다. 포이에티케(Περὶ ποιητικῆς, 作詩術)에 따르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짜는 극은 비극이 아닌 코미디이다. 그리고 코미디는 기형(deformity)이다. 현대인이 조직화한 전지와 전능의 모순은 마침내 이 거대한 비극을 코미디로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마저 코미디로 바꿔 놓는다. 전지와 전능에 대한 저속한 이해를 하나님 아들의 죽음에 적용했을 때 일어나는 이해이다. 미리 모든 것을 알고 짰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극은 오르지 ‘앎’의 현시를 통해서만 참된 비극으로 형성된다. 비극은 모르던 상태에서 알게 된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 비극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 역시 모르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할 때만 효력은 발생한다. 이리하여 구속의 역사는 ‘비극’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헨’의 힘이며, 에케 호모(Ecce Homo, 보라 이사람을!)라는 유명한 감탄사의 원형이 되었다. 인간이 신을 심판할 때 쓰는 말이다(요 19:4). 즉 ‘선악을 아는 일’의 궁극은 죽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한 체험일 것이다. 영생의 원천인 생명나무 실과에 접근을 막은 원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