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으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는 사데(שָׂדֶה), 바르(בַּר) 그리고 아주 드물게 야게브(יָגֵב) 정도가 있으나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이라는 대목의 원문 상에는 ‘밭’이라는 명사가 없다.
‘일하다’는 동사 아바드(עָבַד)의 분사를 “밭 갈아도”로 의역한 것이다.
즉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해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일하는’ 상태가 디폴트이다.
다시 말하면 1장에서 소급하여 읽을 때는 마치 노동이 징벌인 것처럼 연상되지만, 2장에 기초하여 읽을 때는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일하며 지키게” 하신 것이기에 노동은 징벌이 아니다. 본래 ‘일하다’는 뜻의 아바드(עָבַד)를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는 의미로 과도하게 번역했을 뿐이다.
이 아바드 동사는 시초를 고하는 2장 5절에서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2:5) 라고 했던 기본 전제와도 맞물려 있는 동사다.
“경작할 사람”에 바로 이 아바드 동사가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작은 징벌이 아니며, 흙으로 사람을 지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은 후 그를 동산에 둔 목적이자 본령이다. 다만 땅을 다스릴 때(경작했을 때) 효력 대신에 산출된 가시와 엉겅퀴가 변수로 임하였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흔히 진노한 신이 내리는 불심판과 같은 어떤 결과로써라기보다는 뜻하지 않은 계기로 발생한 형질의 변화로 임하였다.
가인에게서의 형질의 변화는 아예 그 효력 자체를 상실함으로 도래하였다.
따라서 창세기 1-4장에 이르는 인간의 생존과 결부되어 임한 환경적 괴리는 하나님의 징벌이라기보다는 당초 창조된 원리의 형질 변화로 일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이 없다는 의미로 임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즉각적 개입이 최소화된 자연계에 대한 상실과 훼손이 곧 하나님의 징계라는 세계관의 강조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