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신(神)은 배요…”라는 표현에 대하여.
매일묵상/ 2016년 2월 19일 금요일
본문: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ㅡ창세기 14:17-24.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ㅡ빌립보서 3:17-21.
관찰:
1.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창 14:23)
2. 그들의 신은 배요 (빌 3:19)
묵상:
3. 십일조의 유래와 기능에 대하여 묵상.
느낀점:
4. 한 2-3년 전에는 “십일조 안 해도 된다”, “십일조는 비 성서적이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돌더니 최근에 이르러서는 “헌금 없는 주일/예배” 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해설:
5. 위 창세기 본문은 ‘십일조’의 유래를 담고 있다. 이것은 십일조가 법이 아니라 당초에 신앙고백임이었음을 밝힌다. 이후에 이것이 제식화 되는 과정에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부여 받는다.
1) 신학적 의의: 이것은 멜기세덱 신학과 관련 있다(중요). 멜기세덱은 ‘선재’(pre-existence) 신학의 심볼이다. 법보다 앞선다는 의미에서 자주 끌려나와 등장한다. 우선 정통성에 시달리던 사독 계열 제사장(Zadokites)이 멜기세덱 전승을 가져다 썼고(아론/레위 자손 아니니까), 정통성이 사실상 없었던 헤롯도 이 신학을 차용했다. 또한 정통성에 대한 핍박을 받던 예수 그리스도와 그 후예들 역시 이 신학을 보다 체계적으로 계발한 대표적인 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멜기세덱의 반차(순서)라는 말이 그것이다. 율법보다 먼저 앞섰다는 개념. 그것은 마치 멜기세덱이 그리스도였던 것만 같은 메타포로 가용되고 있다. 십일조가 미개한 율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신학도 미개한 신학이 되고 마는 셈.
2) 신앙적 의의: 앞서 말한 대로 십일조는 현대 교회의 정회원 회비 성격으로 전락한 일면이 크나, 십일조의 본질은 자기고백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넉넉히 이기게 하심에 대한 감사로서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오로지 집사, 권사, 장로 되기 위한 실적으로만 납부(?) 하는 사람은 상당히 미개한 짓이지만서도, 현대 교회에서 사실 십일조 말고 믿음을 알아볼 다른 대안이 없는 실정이기도 하다. 목사에게 엄청 살살거리고 선물공세 하는데 십일조는 고사 헌금 자체를 아예 안하는 사람도 있.
3) 사회적 의의: 십일조에는 사회적 기능이 있다. 이 제도는 본래 레위 자손의 인구수와 관련이 있는데, 레위 자손의 인수는 이스라엘 사회 전체 인원의 십일조 비율을 의미한다(딱 떨어지지 않더라도). 알다시피 레위는 부동산 소유가 금지된 대신 고아(/과부)와 더불어 이 십일조로 먹고 살게 되어 있다. 사회의 정화 작용을 위해 그리 설계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레위가 먹고 살기 힘든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왜? 제사를 지내러 좀 와줘야 하는데 당최 오질 않으니, 레위가 체면 불구 부유한 가정의 개인 사제로 취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먹고 살 일이 막막한 레위가 이런 쌩쇼하는 광경이 사사기에 담겨있다(사사기 주제는 삼손이 아님). 이러한 레위의 타락과 퇴락이 결국에는 다윗의 성전 신학을 불러오게 된 것으로 보면 별 무리 없다. 그렇지만 성전의 붕괴는 역시 제사의 빈곤 즉, 십일조라는 ‘비율’의 붕괴에서 또다시 촉발된다. 오늘날은 십일조의 과잉이라기보다는 그 비율의 파괴, 즉 십일조의 불균형이라는 점에서 이하동문(많은 데는 많고 없는 데는 없는). 이런 불균형을 “있는 자를 더 있게 하셨다”며 자랑질하는 사제들이 비율(logos) 파괴에 더 보태고 있다.
십일조의 유래가 담긴 위 본문을 잘 읽어보면,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창 14:23)
ㅡ하는 대목이 있다. 대부분이 간과하는 이 말이 시사하는 바가 이 시대에도 크다.
사실 아브라함은 전쟁의 승리자이므로 노획물을 취해도 아무 문제 될 게 없었는데, 거기에 손을 안 댄 이유가 세속의 왕이(소돔) 말하기를 “내가 아브라함 부자 만들어줬다~~”고 떠벌일까봐 안 먹겠다는 얘기다. 단지 부하와 동맹들의 인건비 실비만 제하겠다는 것.
즉, 다시 말해서,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나를 포함한 다른 어떤 존재가 이르기를 “내가 OOO아무개 부자 만들어줬다~~” 하는 구설수를 미연에 차단하는(부정하는) 고백적 수단인 셈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제식화 단계를 거쳐 (물질로 구성된) 이 땅의 모든 사물에 대해 적용이 된 것이다.
이 시대에 십일조가 이런 저런 ‘조건’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도리어 ‘조건’을 파괴하는 선언적 기능이었던 셈이다.
결단과 적용:
6. 이러한 제식화(율법)가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하늘의 시민권”이라는 형이상학 정체성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렇지만 바울은 이런 믿음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세태를 이와 같은 말로 한탄한다.
그들의 신(神)은 배요 (빌 3:19)
여기서 ‘배’란 사람의 신체인 배(stomach)를 가리키지만 그것은 일종의 완곡한 표현이다. 바울이 애용하는 술어들 속에서 ‘빈 공간’을 뜻하는 이 κοιλία라는 말은 σκεῦος (살전 4:4)와 더불어 신체의 생식기관(sexual organ/ uterus)이라는 주장은 참조할 만하다(Chris Mearns).
왜냐하면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에는 자기 허기를 쫓아, 혹은 자기 욕망(Id)을 쫓아 행하는 무수한 일탈이 팽배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허영이 믿음인 줄 착각하는 이도 문제지만, 전통을 무시하고 즤가 의미 제정하고, 즤가 석의해 새로운 법들로 개정해 놓으면 뭔가 대단한 개혁이나 한 줄 아는 부류들이 이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바울 서신들에서 한탄하며 지적한 ‘인식의 마비’(Cognitive paralysis)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의 결과다.
기도:
7. 나― 내 배 섬기는 자 되지 않게 하소서.
너― 아브라함이 실행한 특권을 잃지 않기를.
우리― 하늘의 시민 되소서.
cf. Lectionary, Friday (February 19, 2016): Psalm 27; Genesis 14:17-24; Philippians 3: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