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드개는 왜 마르둑(Μαρδοχαῖος)이 되었나

모르드개는 왜 마르둑(Μαρδοχαῖος)이 되었나

에스더서의 개요를 흔히 이렇게 요약을 한다.

1. 왕비가 되는 에스더(1-2장)
2. 하만의 음모(3장)
3. 하만의 죽음: 전복된 음모(4-8장)
4. 부림의 축하(9-10장)

그러나 이는 핵심이 결여된 요약이다.

하만의 통쾌한 죽음만을 이야기 절정으로 보는데서 기인하는 오해이다. 대다수 독자의 기억에서도 그럴 것이다. 하만이 자기가 만든 사형 도구에 자기 목 매다는 것이 이야기 결말인 줄로.

하지만 그것은 9장의 내용을 회피하고 싶은 심리에서 비롯되는 에스더서에 대한 미완의 이해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유대인이 펼치는 대학살극에 서려있다. 그래서 에스더서는 단아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매우 잔혹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유대인은 언제나 당하는 민족의 전형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을 전하는 노예 도덕론자들인데, 어찌하여 대학살극의 주도자로 자처하고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이 문헌이 뭔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다. 그것은 에스더라는 문헌이 정경 묶음 안으로 들어오는데 있어 가장 늦게 확정을 받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또한 이는 사해문서의 경우 정경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에스더서만은 포함하지 않은 원인일 것이다.

에스더서의 독자는 아직 바벨론에서 탈출해나오지 못했던 듯하다.

왜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바벨론에서 취득한 재산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야웨에 대한 신심이 덜했을까?

아니면 유대식 전승을 바벨론풍으로 위장한 것일까?

우리는 모르드개라는 이 기인한 인물의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인물로 알려진 모르드개.
에스더에게 야멸찬 희생을 요구했던 모르드개.
그는 누구인가.

모르드개라는 이름은
70인역에서 이렇게 기록을 한다.
Μαρδοχαῖος(마르도카이오스)

히브리어로 모르드개(מָרְדֳּכַ֗י)는 대개 첫 모음 카메츠(ㅜ)를 카메츠 하툽으로 읽는 바람에 ‘오’로 독음하지만, 이는 카메츠인 ‘아’로 읽어야 맞다.

70인역도 מרדכי를 그렇게 읽은 것이기 때문이다.

Μαρδοχαῖος(마르도카이오스)라는 이 이름은
바벨론의 주신(主神) ‘마르둑’의 그리스식(헬라어) 이름이다.

이와 같은 모르드개의 정체를 확인할 때,
우리는 에스더서의 진면목은 바로 9장에 나오는 학살에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도륙과 진멸’이라는 어휘로 장식한 이 9장은 모르드개가 (대적을) ‘찢었다’는 행위적 표현에 천착한다. 바로 이것이 에스더서가 갖는 문학적 진수이다.

마르둑(Marduk)은 구세대 악신인 티아마트라는 거대한 용을 죽이고 마침내 새로운 세대를 여는 바벨론식 스토리텔링 주체의 전형으로서, 이 때 티아마트의 절단된 사체를 이용하여 세상의 육지/대륙을 새롭게 만들었다는 것이 주된 플롯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 유대인이라면 기독교인은 경악을 금치 못할 수도 있지만,
에스더서의 1차 독자는 여러분이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 인지 바벨론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유대인 문필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내기 위하여 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다한 것인지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올 일이다.

이것이 바로 이 드라마에서 모르드개가 금면류관을 쓰고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에스더의 승리인가 모르드개의 승리인가.
그것은 구속사-메시야에 대한 기대의 환유라는 점에서 에스더를 능가하는 모르드개가 갖는 지위이다.

이러한 이해 때문에 에스더서는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문헌임에도
타나크(TaNaK) 가운데 케투빔에 포함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사실은 에스더뿐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유대인의 경전 전체가 이 바벨론 포로기의 기호들을 빼고서는 정경 자체를 구성하기가 어렵다.

1) 욥기 26장에 나오는 라합은 바로 저 거대한 암용인 티아마트의 딸의 이름이다.

2) 예레미야의 후기 예언,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50:2)에서 므로닥(מְרֹדָך)은 바로 마르둑(Μαρδοχαῖος)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3) 창세기에 나오는 ‘니므롯’이라는 이름도 이 마르둑에서 온 말이며, 탑의 명칭을 바벨이라 붙인 것은 괜히 붙인 것이 아니다.

4) 성경 도처에 등장하는 리바이어던도 대부분 이 티아마트의 은유이다.

5) 창세기의 땅이 바다에서 그 윤곽을 드러내는 것도, 태초의 빛과 어둠 사이를 하필 ‘찢어’(בְדֵּ֣ל)라고 표현한 것도 다 이 리바이어던의 신체 절단과 관련이 있다.

6) 그리고 무엇보다 야곱이 베냐민에게 종언 축복을 할 때,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찢는다”라고 하였는데, 에스더서 9장에서 대적을 찢는 일로 마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베냐민 지파인 까닭이다. 이것이 바벨론 탈무드의 형식이 되었다.

7) 그리고 끝으로 이 환유가 바로 마가복음 9장에도 들어와 있는 것이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ㅡ 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오리겐처럼 말 안 듣는 신체를 훼손하거나 절단하라는 말이 아니라,
실족케 하는 신체를 절단하고서라도 새로운 세계를 열라는 앞서 모르드개(Μαρδοχαῖος)의 도상을 은유한다.

이 신체 절단의 은유는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ㅡ 는 바다를 소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실족케 한 ‘작은 자’란 내 신체의 부분이며
‘잘린 신체(지체)’로라도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불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불에서 소금치듯 한다는 말이 (불)바다에 상응하는 것은, 바다 즉 탈라사(θάλασσα)가 본래 소금을 뜻하는 할라스(ἅλας)에서 온 까닭이다. 바다의 소금이 절이듯이 불이 그 살을 절인다는 것이다.

특히, 그 지체는 ‘범죄’케 한 신체가 아니라 ‘실족'(σκανδαλίζω)케 한 지체를 이른다.

개역성서에서 ‘실족케’라 잘 된 말을 ‘범죄케’로 개정한 것은 개정판의 심각한 퇴행인데, 이 ‘실족’은 예수님도 당하실 뻔한 실족(스캔달론)을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죽지마소서ㅡ 할 때의.

결론적으로
이 마지막 신체 절단의 도상은

기독교인을 말살하려는 상황을
부림절의 도상 속에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신체(지체) 즉,
한 겨레에 대한 경고이다.

불로 소금치는 불지옥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 참고 그림: 산타 루치아(Santa Lucia). 이 중세의 도상이 ‘신체 절단’에 관한 가장 올바른 이해이다. 4세기 시실리의 루치아는 많은 남성의 구애를 받았지만 주님의 길을 결심했다. 거절당한 뒤 앙심을 먹은 한 남성이 루치아를 기독교인으로 당국에 고발한다. 디오클레시안 치하의 이 총독은 루치아를 창녀로 만들어 몸이 짓밟히도록 했으나, 루치아는 스스로 두 눈을 뽑아 앞으로 닥칠 치욕을 방지했다고 전한다. 루치아라는 이름은 lux 곧 light(빛)이라는 뜻이다. 바로 에스더(אֶסְתֵּר‎ /별)라는 이름이 갖는 기호이기도 하다.

Santa Lucia, Jacopo Palma il Giovane, Chiesa dei SS. Geremia e Lucia, Venezia, (1620)

 

Saint Lucy by Domenico Beccafumi, 1521, a High Renaissance recasting of a Gothic iconic image (Pinacoteca Nazionale, Siena)

 

Saint Lucy, by Francesco del Cossa (c. 1430 – c.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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