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오적
오적(五賊)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4호 위반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김지하를 처음으로 감옥에 보냈던 시다. 판소리 형식의 한자어/비속어를 섞어가며 세태를 풍자한 이 시는 <사상계>라는 교양지가 5ㆍ16군사혁명 10주년을 맞아 특집을 내면서 18쪽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해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 특정 사회 지도층들을 한일합방 을사5적에 비유해 비판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담고 있다. 특히 당해에 발생한 ‘3ㆍ1고가도로 정인숙 피살사건’을 정치 사건으로,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를 고위 공직자 부패에 기인한 사고로 묘사했으며, 그 오적들을 잡으러 갔던 포도대장마저 결탁해 이를 고변하는 힘없는 백성들만 도리어 잡아 가둔다는 이야기로 마친다. 당시 2030세대였던 그는 사형선고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사건>과 관련해 재차 구속되어 또 무기징역 형을 살다가 유신정권이 붕괴되고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석방된 이후에는 각 종교의 생명사상을 수용하고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다가 1991년 분신자살 정국에 우파 일간지 조선일보 사설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91.5.5.)는 글로써 분신 정국을 강하게 규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2012년 11~12월에는 <이 가문 날에 비구름>이라는 강연을 통해 대선 후보 박근혜를 사실상 지지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녀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던 정권 독재자의 딸이다. 그의 커밍아웃이 유리한 정당은 호재로 활용하는가 하면 불리한 정당은 변절이라고 폄하하는 등, 극단의 평가로 갈리고 있다.
프린서플 | 변절인가 변화인가
우리는 변화하는가 변절하는가? 우리 사회는 변절하지 않는 것을 최고 미덕 가운데 하나로 올려다 놓고 추앙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또 구태라며 규탄 합니다. 변하라면서 변치 말라는 셈입니다. 이 모순된 이중성을 사회적 세대 간의 이행에서 주로 만나게 되며, 한 가족 속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딸 세대 간의 이행에서도 만나며, 심지어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양날의 계시 속에서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각각의 생명을 잉태하고서는 서로 알아보고 축복하는 장면을 통해서는 그 세대 간의 이행 순리가 어떤 것인지 잘 말해줍니다.
둘은 같으면서도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는 서로 맞닿아 있는 ‘율법과 복음,’ 두 세대를 표징합니다(눅 16:16; c.f. 마 11:11-13). 그래서 둘은 출생의 때로부터 그렇게 같으면서도 달랐습니다(1:5-25, 26-38). 요한의 부모는 나이 많아 아이가 없지만(vv. 5-10) 예수님의 부모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vv. 26-27). 수태계시가 양쪽 모두 천사에 의해 전해지지만 한 편은 아버지 사가랴에게(v. 12-13) 다른 한 편은 모친 마리아에게 전해집니다(v. 29-30). 그리고 그 천사가 전자에게는 나타났고(v. 11) 후자에게는 들어가(v. 28) 전합니다. 아울러 무엇보다 사가랴에게는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v. 15) 마리아에게는 ‘주 앞에서’가 아닌 “그가 큰 자가 될 것”(v. 32)이라 말합니다. 양자는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지만 앞과 뒤는 명확히 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갈립니까?
이전 세대가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의 어머니로 알아보고 자기 복중에 있는 요한이 뛰어놀 정도로 기뻐한다고 증언합니다. 실제로 그는 성인이 되어 회개케 하는 사역을 선행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는 말로써 새로운 세대를 수용하고 적극 예고합니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인 것입니다.
두 세대가 생명이라는 주제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두 세대의 만남은 이미 태중 곧 여성성 속에서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남성에 대비된 성으로서 여성성이 아니라 생명의 공간으로서 여성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축복이 무병장수의 기원 같지만 사실 요한과 예수 양자 모두는 곧 죽을 운명으로서 하나 됩니다. 현대 웰빙 식의 생명이 아닙니다. <큰 자>의 죽음은 만인을 살리는 죽음으로, <주 앞에서 큰 자>의 죽음은 그 만인을 위한 생명 사역의 길을 예비하는 죽음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두 다른 태의 생명이 만나서 서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수많은 세대교체가 발생합니다. 선배와 후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특정 세대 정권과 그 다음 세대 정권이 어떤 형태로든 교체를 야기 시킵니다. 여기서 변화가 충족되지 못한 교체는 구태로 판정 당하고,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변화는 변절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세대교체의 형식과 과정들이 가져오는 이 같은 모순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변화는 오로지 <화해>를 동반하는 변화뿐입니다. 화해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김지하의 오적(五賊)에서 <생명>까지.
그런 점에서 김지하의 커밍아웃은 확실히 ‘변화’ 맞습니다. 그의 변화된 텍스트에는 생명과 화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거역하는 세력을 지칭할 때 쓰는 ‘수구’란 말이 최근엔 단지 노인층을 겨냥한 전용어가 되어 버린 상태지만, 설령 그들이 젊다하더라도 노인 김지하처럼 생명을 향한 부단한 변화가 없다면 변치 않는 그들이 도리어 수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이미지 출처:
http://www.ahammalgul.com/?document_srl=13543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52053081
http://pasanetworkusc.blogspot.kr/2012/09/pasa-network-executive-board-election.html
http://www.hanscomfamily.com/2010/05/31/today-in-history-105/
http://aesaintsoftheday.blogspot.kr/2010/06/nativity-of-st-john-baptist.html
http://jamestabor.com/2009/12/
http://charmedyoga.com/tag/freedom/
http://educationworksonline.wordpress.com/2010/01/12/education-and-freed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