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담은 ‘2017년 기독교 도서 베스트 9’는 2016년 12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출간된 책을 대상으로 하였다. 순서는 우선 순위와 관련이 없으며 성서(신약, 구약), 교회사, 인문, 실천 분야들 골고루 안배 하였다.
처음 만나는 루터 ―개혁과 건설에 온 삶을 건 십자가의 신학자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하여 교계의 각종 이벤트나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단순 기념서를 넘어 저자의 다채로운 이력만큼이나 입체적으로 ‘루터’를 그려냈다. 구태의연한 역사서도 아니고 과장된 소설도 아니고 루터의 생애와 정신을 조화롭게 구성한 책이다. 특히 첫 챕터의 루터 초상화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근엄한 루터의 모습 외에도, 당대에 루터에게는 충분히 모욕적이었을 법한 가톨릭의 비방 선전물로 제작된 초상화도 포함시키고 있어 당시의 생생한 현장으로 잘 인도해준다.
구조로 본 마가복음 ― 내러티브의 거시적 구조와 미시적 주해
복음이면 복음으로 읽어야지 왜 구조로 본다는 것인가. 이런 읽기의 방식을 꾀하는 분야를 성서신학이라 부른다. 마가복음은 가장 거친 필치로, 가장 짧게 기록해 낸 복음서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다른 복음서에 비해 미완의 이야기처럼 느끼지만, 상대적으로 속도감 있게 읽힌다. 그런데 그 속도감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글의 구조라는 사실이다. 즉 마가복음은 미완의 작품이 아니었던 셈이다. 비단 마가복음서뿐 아니라 그 어떠한 성경 문헌도 구조가 없는 것은 없다. 그 구조를 장악할 때만이 해당 문헌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메시지에 집적할 수 있다. 일반 독자에게는 이런 성서신학 읽기가 다소 건조할 수 있으나, 이젠 일반 독자도 이런 성서신학 문헌을 읽을 때가 되었다.
로마서 (2판)
책 한권 저술로 인생이 달라진 사람이 꽤 있다. 칼 바르트도 그 중 대표적 인물이다. 스위스의 변두리 탄광촌의 목사로 있던 그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 바로 이 로마서 주석이다. 이 책에 대한 저 유명한 찬사,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는 표현에 나오는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놀랜 그의 신학과 사상은 이 책을 중심으로 두 번의 변화를 겪는다. 첫 번째 변화는 이 책의 초판본(1919)이 나왔을 때이다. 거기 담긴 주된 내용은 하나님과 세상/인간의 질적인 차이다. 그 이전에는 차이를 못 느꼈던 것일까? 우리 스스로 이 책을 직접 읽어보면 정말이지 정신이 확확 깨어나는 것을 체험한다. 하나님과 세속/인간의 질을 그간 얼마나 섞어놓고 신앙생활 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이 책을 내고 난 뒤에 또 한차례의 변화를 겪은 것 같다. 그나마 남아 있던 세상의 어떤 긍정적인 요소, 세상에 내재 된 하나님, 특별히 그의 나라 된 요소까지 아예 싹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와 같은 변화를 담아낸 것이 1922년에 발간 한 개정판이며, 올해 한글로 번역된 이 책도 바로 그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평가가 다르다. 개정판이 낫다는 학자도 있고, 초판에서의 신학이 더 완성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이 개정판 역본인 덕택으로 칼 바르트의 로마서 실제 본 내용을 접하려면 무려 80쪽 이상은 넘어가야 한다. 개정판 편집자들의 부연이 많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목차에 고스란히 앉힌 칼 바르트만이 이해했던 로마서 구조와 만날 수 있다. “밤”, “인간의 죄”, “하나님의 의”, “역사의 음성”, “다다오는 날”, “은혜”, “자유”, “영”, “교회의 곤경”, “교회의 직책”, “교회의 소망”, “거대한 방해”, “사도와 신도들”. 한마디로 종말론적 리듬이다. 주석이란 대개 성서신학 작업으로 분류되지만 이 주석서는 그런 주석과는 달리 한 문장 한 문장, 한 문단 한 문단… 마치 폭탄을 제조해 날리듯 터뜨린다. 한글 번역으로는 이미 90년대 말에 나온 것이 있기는 하나 다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였고, 이번 역본은 게르트 타이센의 「역사적 예수」를 번역했던 손성현 박사가 맡았다.
고전
기독교인이 되고나서 한 1년을, 나는 본의 아니게 신앙의 책들만 집중적으로 접하였다. 그러고서 내린 결론은 이런 다짐이었다. ‘이제 난 앞으로 소설 따윈 절대로 읽지 않을 거야.’ 소설은 그 장르 자체가 거짓말로 쓰기를 작정하고서 쓰는 기록이고, 오로지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간증 같은 기록만이 사실을 담은 참된 책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 같은 독서 태도를 어디서 배웠을까? 분명 누군가로부터 배웠을 텐데? 그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이 책 《고전으로의 초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이 세속적 소설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방, 거실 등 책을 두는 장소를 제가 방문한다고 해봅시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요? 바이런, 스콧, 셰익스피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솔한 말과 신성모독을 일삼는 저자들입니다.” (p. 15)
바로 19세기의 위대한 전도자 찰스 피니가 한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오스 기니스는 문화를 향한 이 같은 경멸의 태도 즉, 자신은 잘 받은 교육 덕택에 청중을 사로잡는 설교를 구사할 수 있었으면서도 문화를 경멸하는 그런 태도에 개탄한 나머지, 그것을 문화적 속물근성(Philistinism)이라 지적한다. 훗날 나는 다행히 고전(classic)이 없는, 그리고 고전을 부정하는 무저갱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은 고전이 없는 천국을 전전한다.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고전 저술가들이 지금 천국과 지옥 중 어느 곳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알려면 단테의 《신곡》을 읽어봐야 한다(이 책의 제17장). 그런가 하면, 단테가 그곳에 가서 그들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표지하는 중세신학의 여파이다(제 16장). 또 그토록 난삽해진 중세신학을 개혁해내기까지, 그 개혁의 구심축이던 마틴 루터의 무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려면 《바벨론의 포로가 된 교회에 대하여》같은 그의 대표작들을 읽어봐야 한다(제 22장). 그러면 그가 “1502년에 학사학위를 받자마자 수도원에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가족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p. 197)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그 한 날 한 시에 이루고 마친 게 아니라 지속적인 저술과 번역 작업을 유지했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었다. 루터는 10년 이상을 수도원의 수도사 신분으로 있었는데, 현대인에게 수도원이란 신앙서적이나 신학서적만을 갖추고 있는 토굴 정도로 연상되기 십상이지만, 전통적으로 수도원은 고대의 다양한 인문 저술을 필사하고 보전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루터 같은 개혁세력에게는 일종의 병기고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즉 루터의 저력은 1512년에 받은 박사학위가 아니라 고전으로 다져진 인문학 저력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고전이 아니었으면 종교개혁도 없는 것이고, 기독교 수도원이 아니었으면 그 주옥같은 고전들이 인류에게 전수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덕택으로 신학대학을 안 나온 찰스 피니 역시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고전이 그를 교육했던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상호 관계에 관하여 중점적으로 다루되, 그 고전들을 무려 78개 이상이나 소화해내고 있다. 여기서 다루는 모든 책이 다 개혁자를 길러낸 고·중세의 고전들이거나, 그 개혁(자)들로 인해 달라진 이후의 근세를 담아낸 고전들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다. 이 책에서는 이 상호 관계와 연관성을 무시하는 기독교인의 태도를 가리켜 (문화적) 속물근성이라는 말을 쓰는데, 역자가 ‘속물근성’이라 번역한 이 필리스티니즘(Philistinism)이란 말은 본래 ‘블레셋 사람’(philistine)에서 유래하였다. 어찌하다가 기독교인이 블레셋인이 되었을까. 14세기 옥스퍼드의 한 주점에서 벌어진 대학생들과 주민들 간의 패싸움이 여러 날 이어진 끝에 주민들이 대학에 난입해 학생 6명을 죽이는 사건으로 번진 일이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서구 미션스쿨의 교목들은 종종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삿 16:12)는 제목의 설교로 훈계를 하게 되었는데, 이 말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유물론적 근성을 꼬집는 말로 순환된 것이다. 지적(知的)으로 이미 삼손인 기독교인이 영적 이유에서 스스로 고전을 막아서는 태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영적이라기보다는 블레셋 사람의 유물론적 표지에 더 가까운 셈이다.
예언자적 설교 (The Practice of Prophetic Imagination)
현재 팔순을 훌쩍 넘긴 작가 월터 브루그만은 구약학의 거장이다. 그의 구약학 방법론은 ‘상상력 있는 해석’(imaginative interpretation)을 강조한다. 상상력을 동반한 해석(imaginative construal)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위로 경계를 넘어서는 어떤 방임 된 상상이 아니라 성서 속의 공동체가 체험하고 목격한 역사적인 것들을 현 시대 우리에게로 전수해오기 위한 역동성으로서의 상상력이다. 사회학적 문맥을 중요시 하는 브루그만은 구약에서 선명한 두 줄기의 신앙 곧, ‘약자의 신앙’과 ‘왕조의 신앙’, 이 극단의 신앙을 구약성서 전승 사조의 중요한 두 기둥으로 삼고 그 중심선상에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주문한다. 그와 같은 기반위에 나온 책이 40여년 전 「예언자적 상상력」 이었다. 금번 「예언자적 설교」는 그 실질적인 응용으로서 설교 안내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꼭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구약신학 기반에서 메시지를 다루는 방법을 익히는데 유용할 것이다.
도킨스의 신 (Dawkins’ God) ― 이기적 유전자에서 만들어진 신 까지
이 책의 저자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24살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다. 그러나 그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전향한 것이다. 그 뒤로 그는 매우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써왔는데 교회사, 조직신학, 선교학 등 그야말로 기독교/신학의 전 방위 분야로 손 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의 넓은 지평의 저술을 펼치고 있다. 그런 그가 자기네 나라의 저명한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를 겨냥한 글을 안 썼을 리가 만무하다. 이 책은 2007년도에 「도킨스의 신 (리처드 도킨스 뒤집기)」 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초판의 개정판이다. 그 이전 해에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 대응하는 책이기도 하다. 아직 접하지 못한 독자는(젊은이는 더더욱) 둘 다 접하여서 과학적 변증법을 익혀두면 유익할 것이다.
로제타 홀 일기 5 (셔우트 홀 육아 일기)
선교사 열전은 고통의 산물이다. 영웅열전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가족, 특히 배우자가 겪어야 하는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윌리암 캐리의 배우자 같이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따라나섰다 아들도 잃고 정신착란에 빠지는 극한의 경우가 있는가 하면, 로제타 홀 같이 결혼 전부터 남편과 함께 선교를 꿈꾸고, 함께 준비하고, 함께 선교지로 나서는 배우자도 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이 누구에게만 골라 찾아드는 것은 아니다. 1892년 윌리엄 제임스 홀과 조선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의료사업에 매진하던 로제타 홀은 결혼한 지 2년 5개월 만에 남편이 죽어 조선 땅에 묻는다. 보통 남편 선교사가 사망하면 영구 귀국하기 마련이지만 그녀는 중단 하지 않았다. 다시 조선으로 왔고, 이 조선 땅에서 가족 잃는 슬픔을 또 한 번 겪는다. 딸이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역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의 남편과 딸은 서울 양화진에 묻혀 있는데, 양화진에 본사를 둔 홍성사에서 로제타 홀 일기 시리즈를 지난 2015년도부터 출간해오다가 이번에 제5 권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일기들은 어떤 외국 여성의 수기집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신앙의 뿌리이다.
지렁이의 기도 ―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다. 「지렁이의 기도」라는 책이다. 이 책 역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타이틀을 걸고 출간된 책인데, 의외로 역사서가 아닌 기도 관련 서적이다. 이 책의 저자는 계시를 통해, 한 지인의 태어날 아기가 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한다든지, 그 다음 낳는 아기는 아들이라는 사실, 심지어 장차 남편이 아플 것이며 다른 지역으로 집을 옮기라는 성령의 감동까지 (당사자 대신) 받았다는 내용 등을 기도의 회복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 사실 이런 신비한 체험은 명시적으로 장려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 일상에서도 접할 수 있는, 딱히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기도와 응답들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런데 왜 논란이 일고 있느냐, 개혁신학 흐름 중 하나인 ‘은사중지론’에 반한다는 질타를 맞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논란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라는 제목의 책이 구체적으로 실명까지 들어가며 “손기철 장로의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김하중 장로는 과연 하나님의 대사인가?” “송만석 장로의 이스라엘 회복 운동”, “최바울 대표의 인터콥”, “이용희 교수의 에스더 기도 운동”을 한국교회의 뒤틀린 영성운동으로 지적한 일이 있는데, 다름 아닌 이 책 「지렁이의 기도」 저자가 그 책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라는 사실에 쟁점이 있어 보인다. 현재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의 저자는 은사중지론을 내세워 이 책의 심각한 문제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에 「지렁이의 기도」 저자는 과거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를 출간하는 바람에 자사 출판물이 온누리 교회 서점에 입점을 못하게 되었던 사실을 회고하며 해당 저자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온누리 교회와 고 하용조 목사를 소셜 네프웍에서 공개 비판한 일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기도의 안내서’로서 보다는 현재 한국교회 저변의 출판 시장의 혼돈된 정체성과 상황을 살피는 안목에서 보면 좋을 것이다.
영혼 사용설명서 (Aristotle’s)
이 책은 ‘2017년 기독교 도서 베스트 9’ 목록에 넣지 않으려다가 넣었다. 내가 쓴 책이기 때문에 빼려 했고, 그러나 실상은 상기에 열거한 그 어떤 책보다 영혼에 가장 직접적으로/시급하게 필요한 내용이므로 다시 넣었다. 자세한 책 내용은 이 블로그 글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