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지 문제로 오랜 동안 힘들어 보였던 한 전도사가 A대형 교회에서 다시 사역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A교회 잘 지켜드리세요. 악마의 혀들이 날름거리는 이 난국에 그나마 모두 털리고 나면… 울어도 못하네. 쿼바디스ㅡ”
하지만 이내…
(‘그녀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이 메시지를 남기고는 갑자기 영화 ‘퓨리’가 떠오르면서 한 동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이 영화를 봤을 당시 평가절하 해버렸던 태도를 뉘우치고 이 영화의 몇 가지 세팅을 재구성해 남기기로 하였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혹평하기를 지옥의 묵시록(광기 리더쉽)도 아니고, 플래툰(개성 넘치는 병사들)도 아니고, 일설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미국적 가치)라는 것도 좀 과장이고, 한 75-79점정도 줄 수 있노라고 하였을 것이다.
Setting #1. 구원 받았니? 전 세례 받았는데요?
신참 노먼이 팀에 배치되어 온 날, 그가 아마도 ‘교회 오빠’일 성싶자 팀원들이 조롱하며 묻는다.
“너 구원 받았니?”
“네 저는 세례 교인입니다.”
“아니, 너 구원 받았냐구?!”
“세례 받았다니까요.”
“말귀를 못 알아듣네.”
“Are you saved?” (너.구.원.받.았.냐.구!)
참혹한 전쟁터에서는 세례 받은 것과 구원 받은 것, 둘 중 뭐가 더 효력 있을까? 둘은 같은가 다른가? 이 영화의 전제는 전쟁의 잔인함과 무질서가 이러한 교리를 뒤흔든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Setting #2. 탱크의 구조
탱크 퓨리는 어떤 구조를 띠고 있는 것 같다. 강인한(혹은 잔인한 혹은 용맹한) 심장과 단호한 판단력을 가진 전차장 워 대디와 함께 조종수, 포수, 기관총수, 기관수는 모두 퓨리 한 대를 움직이는 대원들이다. 이들의 팀워크는 그 탱크의 역량을 암시한다.
걸핏하면 성경구절을 인용해대는 바이블이라는 친구의 포지션은 주화기인 포를 발사한다. 백발백중이다. 이러한 직설의 구조는 바람직한 은유가 아니지만 말씀으로 포를 쏘면 백전백승(퓨리는 명성 있는 팀이다), 말 그대로 탱크이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의 전신갑주를 입으라ㅡ인 것이다(엡 6:11-17).
아래와 같이 재구성 할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이 막강한 팀워크로 구성된 탱크는 혼돈스런 바깥세상과의 경계를 두고 어떤 본질을 꾀하는 공간이다. 그들은 그 안에 있을 때만 “이것은 최고의 직업이다.”라고 말한다.
Setting #3. 지상에서의 결혼식 Vs. 공중에서의 결혼식
대전차 전투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퓨리는 승전하고 마을을 접수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술과 여자.
2차 세계대전 때에 러시아군은 독일 여성을 닥치는 대로 강간했다고 알려졌지만 이 영화에 의하면 미군은 적어도 담배 두 갑에 여성을 가진 것 같다. 퓨리의 대원들이 이렇게 질탕하게 즐기고 있는 동안 전차장 워 대디는 막내 노먼을 데리고 건물로 올라간다. 수상한 인기척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나이든 독일 여성이 여조카를 보호하고 있다. 워 대디가 계란과 담배, 그리고 샴페인을 꺼내놓자 경계를 푼 두 여성이 식탁 준비를 한다. 막내 노먼이 무심코 곁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자 독일 소녀는 곁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마음의 빗장을 푼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워 대디는 독일 소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노먼을 부추긴다.
전쟁터에서의 짧은 교감으로 이룬 사랑으로 노먼과 독일 소녀가 시간을 보내고 나오자 오랜만에 품위 있는 식탁이 차려진다. 우아한 시간이다. 그때 마침 술에 취한 나머지 팀원들이 들이닥쳐 막내 노먼을 놀리며 좋은 것은(여자) 함께 나누는 것이라며 독일 소녀에게 손을 데려고 한다. 그러자 워 대디가 고함을 치며 독일 소녀를 보호한다.
면박을 당한 팀원들은 “독일 여자들과 이렇게 식탁에 앉아 있다고 (더럽혀진) 품위가 돌아오는 것이냐”며 지난 전투에서 워 대디가 보여준 잔악함을 고발한다. 붕괴된 의(義)를 적시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공중 위에서 맺은 노먼의 성관계나, 아래 지상에서 다른 팀원들이 맺은 질탕한 성관계는 다 같은 것이다.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다 대가를 지불하고 산 성(性)이 아니겠는가.
다만 공중에서는 고상한 격식이 있었다는 것만 빼고는.
지상의 부하들에게는 그런 우아한 품위가 없다. 열등하다. 하지만 워 대디 역시 지상에서 더럽혀진지 오래라는 모순된 사실을 통해 의와 질서가 파괴된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다.
폭격으로 죽은 독일 소녀에게 다시 돌아가려는 노먼을 저지하며 탄약수가 외친다.
“결혼이라도 하려고 그랬어?”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두 결혼식의 도상(圖像)인 셈이다.
지상의 결혼식 그리고 공중의 결혼식(계 19장).
우리는 어떤 결혼식을 선호하나.
Setting #4.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이제 우리 미문(美門) 실존의 이야기다. 가정에 설립한 지 3년째이다. 가족을 빼고 평균 5명을 넘지 않는다. 큰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ㅡ 라고 기도하지 못(안)하는 것은 앞서 초입에 언급한 A대형 교회와 같은 세속교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요즘 트랜드가 된 이른바 “가나안 교회”(‘안 나가 교회’) 캠페인에 대한 지지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세속교회로부터 입은 내상이 크지만 그들은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지 붕괴시킬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편과 저편 사이 교차로에 끼인 것 같다, 게다가 3년 가까이 작은 교회이다 보면 이 안은 탱크의 내부 공간이기 마련이다. ‘퓨리’ 처럼 고장나 주저앉은 것만 같은 탱크인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갑주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갇혀 있는 셈이다.
세속교회는 말할 것이다. 누가 너보구 지켜달라고 했냐구. (너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점에서 ‘나를 보낸 자는 누구이며 그는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는고ㅡ’ 라는 반문은 퓨리의 통신병이 말했던 “하나님은 지금 체스를 두고 계신가?”라는 반문과 일반이다.
탱크가 고장이 나서 임무 수행이 불가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런 교차로에 머물 이유는 없는 것이다. 도망가 피신해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낸 자가 대체 어디에 계신지 캄캄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때에,
포수 바이블이 워 대디와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같이 암송을 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ㅡ 사 6:8.
“A교회 잘 지켜드리세요…” 라고 말했던 뉘앙스나,
내가 뿌렸던 눈물의 의미는
아마도 대략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 이 영화에 담긴 계시록 메타포 따위가 꽤 있지만 이만 해두자.
(여기까지 3년전)
원글: 저평가했던 퓨리(2014)를 다시 고평가
에필로그
이 에필로그는 새로 남기는 것이다.
상기의 감정선으로부터 무려 3년이 더 흘렀다.
실질적인 전쟁의 공포가 한반도를 휘감아오고 있다.
대형교회는 권위를 상실하여 더욱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깨어있다고 자처하는 기독교인은 대부분 이념의 볼모들이다.
저 교차로에 움직일 수 없게 된 탱크는 미문(美門) 같은 소수의 기독교인이요, 교회요, 그리고 대한민국 자신이다. 교차로에 내몰려 이전보다 더욱 움직일 수 없게 된 ‘퓨리’ 처럼, 그렇지만 중요한 임무를 자각한 ‘퓨리’ 처럼,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다.
교차로에서.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ㅡ 사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