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방송사에서 ‘김정은 신뢰도’라는 통계를 조사하여 결과가 77.5%라며 그것을 여론이라고 보도하였다.
그런 조사를 실행한 기관이나, 그런 조사에 응답을 한 사람들이나, 양자 간에는 모종의 공통된 모순성의 기제가 있다.
우선 이 방송사가 구현하는 상기의 다양한 비주얼 자료의 진지함을 보노라면, 객관적 보고의 형식을 빌리고는 있으나 거의 선전에 가까운 기여를 해내고 있다.
그 다음은 통계에 응한 대중의 반응이다.
지난해 독재정권을 청산한다며 그 갖은 애를 쓰고는, 이제 지금은 다른 독재정권에 호감을 보이는 이상한 반응이 그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러한 현상은 이념의 문제인가? 심리적인 문제인가?
이 물음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의 저자 에리히 프롬이 자기 책 도입부를 장식한 화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모순성은 20세기 초 전 유럽인의 미개한 대중성을 고발한다.
책의 도입부를 잠시 읽어볼 가치가 있다.
세계 대전은 많은 사람에게 마지막 투쟁으로 보였으며 그 결말은 자유를 위한 궁극적인 승리로 여겨졌다. 현존하는 민주국가들은 강화된 것처럼 보였고 새로운 민주국가들이 옛 군주 국가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친 투쟁에서 얻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체제들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효과적으로 지배한 이 새로운 체제들의 본질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많은 사람은 권위주의적 체제가 승리한 것은 몇몇 개인의 광기 때문이며 그들의 광기는 머지 않아 그들의 파멸로 이어지리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얻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탈리아 국민이나 독일 국민이 민주주의를 훈련할 충분히 오랜 기간을 갖지 못했으므로 그들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적 성숙함에 도달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다고 제멋대로 믿어 버렸다.
…
인간의 자유의 적들이 어떤 상징들을 택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파시즘의 이름으로 공격을 받든, 철저한 파시즘의 이름으로 공격을 받든, 자유가 받는 위험이 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가 파시즘과 싸우려 한다면 파시즘을 이해해야만 한다. 희망적 관측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낙관적인 공식을 외는 것은 인디언의 기우제 무용의 의식처럼 부적당하고 소용없는 노릇임이 밝혀질 것이다.파시즘을 낳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의 문제 이외에도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인간적인 문제가 있다. 근대인의 성격 구조에 있어서의 동적인 요소들을 분석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요소들은 근대인으로 하여금 파시스트 국가들에서 자유를 포기하고 싶어하도록 만들었으며 수백만의 우리 국민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유에 대한 선천적인 욕구 외에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소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 없다면 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갖는 매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복종은 항상 공공연한 권위에 향하는가, 아니면 의무나 양심 같은 내면화된 권위주의에의 복종, 내적 강제나 여론 같은 이명의 권위에의 복종도 있는가? 복종하는 데에는 숨겨진 만족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저 광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은 어떤 심리적 기제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하지만, 사실 그것의 진정한 본질은 종교성의 발로에서 출원한다.
종교성이 사회적 체제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종교성이 어떻게 사회적 체제로 나타나는지 나는 앞서 우리사회를 덮친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라는 글에서 그 모종의 메커니즘을 다룬 적이 있는데 여기에 잠깐 옮겨보겠다.
일찍이 플라톤은 인간이 구현하는 정치·사회체계를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왕/군주 일인이 통치하는 군주정(Βασιλεία),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귀족정(Αριστοκρατία), 그리고 다수가 정치를 주도하는 민주정(Δημοκρατία). 아울러 그는 이러한 체제들이 각각 그 일인의 폭정(τύραννος), 소수 엘리트만의 과두정(ἀριστοκρατία), 그리고 다수의 우민화를 통해 중우정(ὀχλοκρατία)으로 변질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인이 지배하는 군주정과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귀족정, 그리고 다수의 민주정이 공존하는 혼합정치가 분명 존재하며 바로 그 혼합의 왜곡에서 폭정, 과두정, 중우정으로 나타난다고 개정하였다.
이들보다 한 세기 뒤에 태어나 활동한 역사가 폴리비우스(Polibius, BC 200-118)는 이들의 정치이론에 발전론을 입혀서 체제의 몰락이란 군주정에서 폭정으로, 귀족정에서 과두정으로, 민주정에서 우민화로 퇴행하는 데서 기인하기에, 로마 제국처럼 군주정에서 귀족정으로,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하는 것이 제국의 안녕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면서 그 혼합의 시스템으로서 ‘공화정’ 곧 집정관, 원로원, 호민관으로 구성된 체제를 그 완전체로 역설하였다.
하지만 그 완전체조차도 몰락을 할 때는 각각의 머리로부터 썩어 들어갔던 것을 감안하면 플라톤의 근원적 통찰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며, 또한 그 체제의 운용면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연(敷演)했던 이상의 다른 혼합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파시즘(fascism)의 등장을 통해서였다.
파시즘(Fascism/ fascismo)은 ‘묶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시오(fascio)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이 파시오란 고대 로마의 정무관이 들고 다녔던 파스케스(fasces)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럼 대체 이 파스케스가 뭐에 쓰는 물건이냐. 파스케스는 막대기를 여러 겹으로 묶어서 그 끝에다 도끼를 달아놓은 일종의 권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는 상징물로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체벌이나 처형에도 사용되었으며 그 상징(물)이 기표하는바, 파시즘이란 한마디로 집단주의의 총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1인 독재자를 지칭하는 말로 전용되지만 실상 역사적으로는 ‘노조’(노동조합)를 이르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un fascio/ 1910).
이 일단의 결속주의(結束主義)는 정치적으로 적용될 때 국가주의, 국수주의적 색채 속에서 급진적 성향을 띠기 마련인데, 여기서 응용해 뻗어 나온 것이 바로 나치즘(Nazism)이었다.
새롭게 인종적 어프로치를 한 셈이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폴리비우스가 자부하던 정치 발달 체제는 썩어 몰락하였음에도 그 어느 것 하나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며, 도리어 새로운 혼합의 옷을 입고서 근대 전유럽을 활보하였고, 이는 어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무솔리니와 히틀러라는 인물을 통하여서 아주 실제적이면서도 막강한 위력이 되었다. 다른 말로하면 왕도 없어지지 않았고, 귀족체제도 없어지지 않았으며, 다수와 혼합된 채 폭정, 과두정이 그대로 살아서 새로운 변혁을 꿈꾸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체주의의 이행의 도식 안에서만 저 희화되고 있는 독재(자)의 도상과 우리식 전체주의의 결합을 이해할 수 있다.
그 광기의 본질은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개인의 묶음(fascio/ 파시오) 곧 우상숭배로서의 기제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의미로서의 우상숭배는 종교가 아닌, 이를 테면 동성애, 이를 테면 전체주의/ 사회주의 정의 실현을 통해서 자기가 자기를 향한 사랑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식의 붕괴가 다음과 같은 블랙 코미디를 실제가 되게 하기도 했다.
상기의 그림은 스페인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조안 코넬라(JOAN CORNELLA)가 전시했던 작품이다. 웃지 못하는 상황을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묘사하는 것이 장기인 이 작가의 특성상 상기의 그림은 다음 일러스트레이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려다 실패한 사람을 어린이의 친구 곰돌이가 나타나 자살을 도와주는 블랙 코미디, 투신 자살한 사람이 막상 물에 빠지자 구조를 원하는데 구조 헬기가 더 확실하게 죽음을 도와주는 이런 블랙 코미디가 바로 이 작가 조안 코넬라(JOAN CORNELLA)의 화풍이다.
아마도 저 김정은과 비슷한 이미지의 도상은 마치 위와 같은 블랙 코미디를 기대하고 그렸을 성싶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온 것이다.
우상숭배 기제에 기인하는 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기이한 이행을, 이면에서 기획하고 지휘하는 세력은 아마도 이 새로운 지도자를 앞으로 ‘통일’이라는 명명속에서 현현시킬지 귀추가 주목된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이론서가 아니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대인으로서 미국으로 망명하기 직전 자신이 겪고 체험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그는 히틀러 혼자 한 일이 아니라고 회고한다.
아마도 그 모든 것들 중 가장 위험한 것일 또다른 일반적인 환상은, 히틀러 같은 사람들이 권모와 술수만으로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를 지배할 권력을 쥐었으며 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단지 폭력만으로 지배하고 전체 국민은 밀고와 폭력의 의지없는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면서 이러한 주장들이 잘못된 것임이 명백해졌다. 독일에서는 잘못된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들의 선조들이 자유를 위해 싸웠던 것과 같은 열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했으며, 자유를 원하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방법을 찾는다는 것, 그리고 다른 수백만의 사람들은 무관심하며 자유를 지키는 것이 그것을 위해 싸우고 죽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ㅡ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Erich Seligmann Fro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