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성서일과로 설교하는 법 (누가의 부활체 이해)

반복되는 성서일과로 설교하는 법 (누가의 부활체 이해)

반복되는 성서일과로 설교하는 법 (누가의 부활체 이해)

 
 
이 글은 한주 네 귀퉁이로 제시되는 성서일과(lectionary)로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적 예시이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내가 선호하는 방법의 전부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주차의 성서일과와 그 해 그 주차의 시대상과 사회상은 그 때 그 때 다르기에 구성의 형식 역시 그 때 그 때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3:12~19; 시편 4; 요한1서 3:1~7; 누가복음 24:36b~48.
[부활절 3주차 본문]

앞서 ‘매주 성경 본문을 정하는 방법’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3년 동안 성서일과 A, B, C, 한 바퀴를 모두 돌았다. 그래서 위 본문은 두 번째 맞는 셈이다.

의의 제사란 무엇인가

3년 전 이 본문을 ‘의(義)의 제사’(시편 4편)라는 주제 속에서 다루었다. 그러면서 당시 ‘지계표’라는 키워드를 떠올렸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묵상한 내용이다.

The 12th boundary stone from Tel Gezer, discovered over a decade before this latest find. The bilingual boundary stone features Greek and Hebrew text with personal and geographical titles. Photo: Bibleplaces.com, Judah and the Dead Sea Collection http://www.biblicalarchaeology.org/

The 12th boundary stone from Tel Gezer, discovered over a decade before this latest find. The bilingual boundary stone features Greek and Hebrew text with personal and geographical titles. Photo: Bibleplaces.com, Judah and the Dead Sea Collection http://www.biblicalarchaeology.org/

1. 지계표. ‘지계석’(an ancient boundary stone)이라고도 부르는 이 경계의 표식은 이웃과 내 땅을 구분하는 돌을 말한다. 그런데 고대에는 자기 구역을 넓히려는 욕심으로 슬쩍 이 돌을 이웃 쪽으로 밀어놓는 일이 빈번했던 모양이다. 성서는 그렇게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를 저주하였다(신 27:17). 합의해서 세운 지계표를 옮겨놓으면 도무지 그 기준 지점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늘날은 지적과가 있지만). 그런 점에서 사람의 양심에 의존해야 했던 이 고대의 지계표는 경계선이 점점 모호해져 가는 이 시대의 법 속성을 잘 표지한다. 오늘날의 법은 어떤 절대적인 경계라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로 인식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義! 하면, 반드시 옳고 바른 것을 뜻한다. 세상에서는 법(法)이 그 개념을 수행하지만 실제로는 그 법의 기준과 경계가 자꾸만 움직여 왔다. 가령 우리나라의 근대화 시기에는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 경찰이 무릎 위로 치마 길이를 재서 기준을 넘을시 처벌 하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법이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오히려 공중파 방송의 선정성은 도를 넘은지 오래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개개인의 자유가 도리어 그 과거의 규정을 독재의 산물로 규정하고 단죄를 실행한 바도 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지금은 집단화된 개인의 자유가 그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계선까지 바짝 다가서 있다. 그래서인지 法! 이라고 통칭은 되지만 사실상 사회적 ‘합의’로 격하된 이 법 인식 속에서 우리가 악인이라는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 (오락가락하는) 경계선의 상대적 개념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3. 상대적 개념으로서 ‘악(인)’이란 무슨 말인가? 현대인에게는 누구나 관계와 입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현대인인 우리는 그 관계를 중심으로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선인이며 누군가에게는 악인이라는 사실까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계와 입장에 따른 오해라고 여기지 자신을 어떤 명시적 악으로 규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대인의 지계석은 땅 아닌 마음에 놓여 있고 그것은 언제나 저만큼 이웃 쪽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예배가 그러하다.

4. 어떻게 하면 이 지계석을 경계석 되게 할 수 있을까? 이 지계석의 문제는 의(義)로 드리는 제사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5. 여기에 그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오로지 하나, 딛고 선 땅을 바꾸어 서 보는 길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 비로소 그 자신이 망각했던 이웃의 지계표 위치는 새롭게 파악된다. 이것을 우리가 뉘우침, 또는 회개라고 부른다. 그 옮겨진 지계석의 위치는 이웃에게로 물러나 있는 만큼, 결국에는 나에게로 밀고 들어온 지계석임을 발견함으로써(왜, 입장이 바뀌어 봤으니까) 의의 제사는 활력을 띠는 것이다.

6. 이때에 그 지계석은 본래에 위치해 있던 경계선상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해 있음에도 뉘우침(깨우침)의 복원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유념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원래 서 있던 그 돌의 위치보다도 더욱 의가 집결 되는 정위 지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지계석의 이동 만큼 회개할 수 있으니까. 따라서 이 지계석은 땅에 세우는 돌이 아니라 마음에 세운 돌, 예수 그리스도인 셈이다.

7. 여기까지가 ‘의의 제사’의 준비태세이며, 그런 점에서 이 제사의 특징은 어떤 ‘악한 제사’에 대조된 제사라기보다는, 복이나 비는 제사(기복)에 대조된 제사라 할 수 있다.
*3년전 설교요지 원문: http://mimoon.tistory.com/29

의의 제사, 그로부터 3년 후

그렇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이 본문을 들고 설교했던 그 결과가 현재 어떠한지, 설교 중에 나 자신에게 먼저 물었다. 이것이 성서일과로 설교하는 자의 곤혹일 것이다. 주제별 설교를 몇 년 씩 하다가 소재가 고갈되면 과거 했던 것 중 적당한 것을 골라 뒤집거나 옆으로 접거나 해서 새롭게 가공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설교에 앞에선 확인 받을 일이 없다. 그래서 성서일과는 훨씬 윤리적이다.

다행히 나에게 결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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