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일과(lectionary)는 3년을 주기로 회전한다. 3년 주기로 같은 성경 본문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은 그처럼 반복되는 본문으로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적 예시이다. 동시에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방법은 아니며 내가 선호하는 방법의 전부도 아니다. 그 주차에 해당하는 성서일과와 그해에 직면한 맥락이 일치하란 법도 없을 뿐더러 시대와 사회상은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성서일과가 있다고 가정하자.
예문: ‘누가의 부활제 이해’
사도행전 3:12~19; 시편 4; 요한1서 3:1~7; 누가복음 24:36b~48.
[부활절 3주차 본문]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이 본문을 받아들었을 때는 지나간 3년간 성서일과 A, B, C, 순환 주기를 모두 완료한 상태였을 것이다. 저 성서일과 본문은 최소 두 번째 혹은 그 이상의 순환을 마친 상태인 셈이다.
3년 전 당시 나는 이 본문을 ‘의(義)의 제사’(시편 4편)란 주제 속에서 다루었다. 그 주제를 중심으로 당시 ‘지계표’라는 핵심어를 떠올렸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다음은 ‘지계표’라는 핵심어를 중심으로 묵상한 내용이다.
의의 제사란 무엇인가
1. 지계표. ‘지계석’(an ancient boundary stone)이라고도 부르는 이 경계의 표식은 이웃과 내 땅을 구분하는 돌을 말한다. 그런데 고대에는 자기 구역을 넓히려는 욕심으로 슬쩍 이 돌을 이웃 쪽으로 밀어놓는 일이 빈번했던 모양이다. 성서는 그렇게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를 저주하였다(신 27:17). 합의해서 세운 지계표를 옮겨놓으면 도무지 그 기준 지점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늘날은 지적과가 있지만). 그런 점에서 사람의 양심에 의존해야 했던 이 고대의 지계표는 경계선이 점점 모호해져 가는 이 시대의 법 속성을 잘 표지한다. 오늘날의 법은 어떤 절대적인 경계라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로 인식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義! 하면, 반드시 옳고 바른 것을 뜻한다. 세상에서는 법(法)이 그 개념을 수행하지만 실제로는 그 법의 기준과 경계가 자꾸만 움직여 왔다. 가령 우리나라의 근대화 시기에는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 경찰이 무릎 위로 치마 길이를 재서 기준을 넘을시 처벌 하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법이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오히려 공중파 방송의 선정성은 도를 넘은지 오래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개개인의 자유가 도리어 그 과거의 규정을 독재의 산물로 규정하고 단죄를 실행한 바도 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지금은 집단화된 개인의 자유가 그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계선까지 바짝 다가서 있다. 그래서인지 法! 이라고 통칭은 되지만 사실상 사회적 ‘합의’로 격하된 이 법 인식 속에서 우리가 악인이라는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 (오락가락하는) 경계선의 상대적 개념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3. 상대적 개념으로서 ‘악(인)’이란 무슨 말인가? 현대인에게는 누구나 관계와 입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현대인인 우리는 그 관계를 중심으로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선인이며 누군가에게는 악인이라는 사실까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계와 입장에 따른 오해라고 여기지 자신을 어떤 명시적 악으로 규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대인의 지계석은 땅 아닌 마음에 놓여 있고 그것은 언제나 저만큼 이웃 쪽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예배가 그러하다.
4. 어떻게 하면 이 지계석을 경계석 되게 할 수 있을까? 이 지계석의 문제는 의(義)로 드리는 제사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5. 여기에 그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오로지 하나, 딛고 선 땅을 바꾸어 서 보는 길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 비로소 그 자신이 망각했던 이웃의 지계표 위치는 새롭게 파악된다. 이것을 우리가 뉘우침, 또는 회개라고 부른다. 그 옮겨진 지계석의 위치는 이웃에게로 물러나 있는 만큼, 결국에는 나에게로 밀고 들어온 지계석임을 발견함으로써(왜, 입장이 바뀌어 봤으니까) 의의 제사는 활력을 띠는 것이다.
6. 이때에 그 지계석은 본래에 위치해 있던 경계선상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해 있음에도 뉘우침(깨우침)의 복원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유념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원래 서 있던 그 돌의 위치보다도 더욱 의가 집결 되는 정위 지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지계석의 이동 만큼 회개할 수 있으니까. 따라서 이 지계석은 땅에 세우는 돌이 아니라 마음에 세운 돌, 예수 그리스도인 셈이다.
7. 여기까지가 ‘의의 제사’의 준비태세이며, 그런 점에서 이 제사의 특징은 어떤 ‘악한 제사’에 대조된 제사라기보다는, 복이나 비는 제사(기복)에 대조된 제사라 할 수 있다.
2012년 부활 후 2주차 설교 요지
‘의의 제사’는 내 삶에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3년 전 당시의 저 ‘의의 제사’에서 3년이 경과한 지금 이 본문을 다시 들고 선 나는 과거의 내 설교와 마주한다.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3년 전 당시에 발행한 설교의 결과가 무엇인지 현 시점에서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이 성서일과의 위력이다. 다시 돌아온 이 본문과 과거에 발행한 설교가 나 자신에게 먼저 묻기를 실행하는 해석학인 것이다.
설교자가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않은 이상은 모든 주제가 설교자인 나 자신에게로 역류하기 마련이다. 이 성서일과의 순환은 보다 구체적으로 설교자인 나의 양심을 먼저 후벼 파고 들어 온다. 이것이 성서일과로 설교하는 곤혹스러움이라고 한 것이다.
소재의 순환은 ‘주제 설교’라고 다를 바 없다. 본문의 순환 문제는 모든 방식의 설교가 공유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주제 설교를 몇 년씩 지속하다 소재가 고갈되면 과거에 했던 설교 중 적당한 것을 고른 후 뒤로 뒤집거나 옆으로 접거나…그런 방식으로 새로움을 가공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창작된’ 새로운 설교에 앞에서는 설교자 자신을 확증할 길이 없다. 이미 가공 단계에서 불리한 것들을 회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일과는 훨씬 윤리적이다.
당시 나의 경우에는 다행히 결실이 있었다. 어떤 결실일까?
설교자인 내 삶에 맺은 내 설교의 열매
나는 20대 초반에 내가 개종하고 다녔던 첫 교회를 떠났다. 떠나오면서 목사님의 만류를 거절한 적이 있다.
처음 예수를 영접하고서 깊은 영적 체험을 하였고 생애 첫 목사님에게 세례까지 받았지만, 나는 진정한 믿음 그리고 더 깊은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그곳에 가만히 안주할 수 없었다. 나의 처음 목사님께서는 그런 내게 두 번 내지는 세 번을 청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두 거절하였다. 그 교회는 작은 개척교회였는데도 말이다.
그로부터 20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마음에서 나는 그 첫 목사님을 잊은 적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이 깊을 수록 고마움과 죄송함이 더해 갔다. 그렇다면 찾아뵈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분을 찾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음에 강권함이 몰려와 해후를 시도하게 되었다. 생존해 계심을 확인하고 손 편지를 썼다. 다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이었다.
목사님. 접니다. 목사님을 한 순간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결혼식 전후로 가업(家業)이 급박하게 돌아가 경황이 없어 못 찾아뵈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르치는 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시작한 지 3년이 되었는데 저도 목사님처럼 가정 아파트에서 합니다.
설교할 때마다 목사님이 서 계셨던 이 자리에 서고 보니
진리란 결국 돌고 돌아 원점에 다다르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두렵고 떨림이 있습니다.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는 나를 어찌 생각할까? 아직 서운함과 노여움은 없으실까? 목사님께서 부담스러워 하진 않으실까? 연락처를 남기면 폐가 될 듯하여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서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며칠 전 전화가 왔다. 목사님에게서 온 것이다. 학교를 통해 수소문하여 전화를 하셨다. 지난 20년 전 목사님의 억양과 톤이 그대로 배인, 그렇지만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진이?”
“네 목사님…”
“내가 만나고 싶은데, 그런데 내일 내가 필리핀에를 가. 다음 주에 시간이 될까?”
“네 물론이죠 목사님…”
“내가 갈까?”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편지를 쓸 때도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전화를 받고 나서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처음 다녔던 그 목사님의 교회는 지금의 나처럼 가정/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리던 교회였던 바, 나는 원점으로 돌아와 있고, 그리고 더 늦지 않게 지계석의 위치를 돌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 주에 목사님을 만나러 간다. 처음 목사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꼭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만 같다. 설렌다. _2015년 부활 후 3주차에 일어난 결실
의의 제사의 결실은 눈이 밝아지는 것
부활 후 3주차 성서일과인 이 본문들에서 택한 중심 본문 누가복음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24장은 매우 기이한 묘사들로 짜여있다. 읽노라면 마치 요한복음을 읽는 것만 같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이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보고 믿으라 하셨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손과 발’을 만져보고 믿으라고 하신다. 부활체에 대한 기묘한 설명인 셈이다. 그 부활체의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도 생선을 구워 드셨는데 누가복음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도 벽을 (스르륵) 통과하신 듯한데 누가복음에서는 더 심하다. 여기에 나타나셨다가 곧 사라지셨다가는 다시 나타나셨다가.
이를 두고 사람들은 마술적이고도 신비롭기 그지없는 부활체의 ‘성능’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은데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부활체) 본문의 핵심은 부활을 맞이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다룬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대체 왜 예수님을 못 알아봤을까? 부활체라서? No.
어디까지나 눈이 가리어져서 못 알아 본 것이다. (눅 24:13)
‘눈이 가리어졌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함을 뜻한다(25절).
믿지 못하니까 이해도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시자, ‘눈이 밝아져’ 그제야 알아보았지만,
그와 동시에 또 사라지셨다(31절). 도술인가? No.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마치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과도 같은 그것은 도술이 아니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빌립이 성경을 풀어주었던 것에 상응하는 누가(Like)식 표현이다(행 8:27-40). 예수님께서도 이 우둔한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셔서 마음이 뜨거워지게 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도 누가가 기록하였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제자들이 이 말을 하고 있을 때에 또 짠- 나타나셨다. 유령이신가? No.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유)령으로 생각하는지라”(눅 24:37)
예수님께서는 이때에 그것을 의심으로 간주해 책망하며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하셨다. 이는 투명인간과도 같은 부활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누가의 부활에 관한 실로 놀라운 교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과거에 눈이 어두워서 나에게 세례를 주신 그 은사 목사님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결국 지계석을 경계로 하는 그가 섰던 자리에 서 있음으로써 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분이 지금의 나처럼 가정/아파트에서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어떤 심정이었을지 모두 보이게 된 것이다.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 이 가장 끝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그 사실 한 가지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그것은 내가 은사 목사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누구나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누구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요한복음 21장에도 상응하는 것이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뱃사람이 되어 고기를 잡으러 생활전선으로 돌아가버리지 않았던가?
에필로그: 주님은 손님
아래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도상은 이 주제를 잘 설명한다.
이제는 너무 흔해 유치할 정도인 이 이미지. 대개 초신자에게는 이 그림에서 예수님이 보이면 구원을 받고 안 보이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소개되곤 하였다. 나에게도 누군가 그렇게 소개하였다.
아마도 가톨릭에서 유래된 이 현대적 도상은 성물숭배가 발달한 카톨릭의 정서상 역사적 진위는 알 수 없지만(아예 사진 원본으로 남았으면 좋으련만) 이것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부연된 저 설명 글 그 자체로서 누가복음 24장에 대한 도상해석에 종사한다.
어떤 사진사가 눈이 녹아내린 대륙을 찍은 것이라고 알려진 이 그림에 있는 캡션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CHRIST is the HEAD of this house; The UNSEEN GUEST at euery meal; The SILENT LISTENER to euery conuersation.
그리스도는 이집의 주인이시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저자 누가가 소개한 부활체는 바로 이런 것이다.
본문 18절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 중 실명으로 거론된 글로바(Cleopas)라 하는 자가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는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손님으로 와 있으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는 누가의 신학이 반영된 중요한 문장이다.
이 제자 글로바는 예수님을 손님으로(παροικεις) 와 계신 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발언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예수님은 우리 집(교회)의 주인이신가? 손님이신가? 블현듯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글로바의 언설을 꾸짖고 계시지만 παροικεις라는 이 어색한 단어에는 누가의 독특한 워딩이 배여 나 있다. 주인이라고 하면 대접을 해야하는 호스트이지만, 손님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는 의도적으로 (부활체이신) 예수님을 여기에 나타나셨다가 곧 사라지셨다가는 또다시 나타나셨다… 하는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성령(파라클레토스)에 의해 전개되는 지속적인 역사를 그려나갔던 것이다. 분명 그 분은 보이지 않는 손님(THE UNSEEN GUEST)이시지만 언제나 주인으로 계신 분인 것이다. 그같은 성령의 바람은 같은 누가의 저작인 사도행전까지 주욱 이어져나간다. 그런 점에서 빌립의 사라짐도 스타트렉 같은 공간이동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에 의한 바람과 같은 사역의 승계를 표지한다 하겠다.
물론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 역시, 이 24장의 ‘눈이 밝아짐’과 연장선상에서 진술한 누가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절 제3주차 | 제목: 저희 눈이 밝아져 | 성서일과, 행 3:12~19; 시 4; 요일 3:1~7; 눅 24:36b~48. (2015)
* 방법론으로 소개되었지만 도식적인 방법이라기보다 발화된 설교에 대한 (1) 이행에 주력한 것, 그렇지만 (2) 핵심 본문에 대한 신학적 주제 또한 도외시 할 수 없으며, (3) 이 과정에서 성서일과 네 귀퉁이가 다 걸쳐 있다. 매번의 설교를 네 귀퉁이에서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조각날 때와 네 짝을 맞추려고 했을 때 분명 메시지는 달라진다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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