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 집단의 듀얼리즘

의인 집단의 듀얼리즘

프롤로그 | 듀얼리즘

세상을 이중의 차원으로 보는 듀얼리즘(이원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로 요약해보면, 우선 가장 원시적 듀얼리즘은 플라톤에게서 나옵니다. 이데아라는 이상적 세계를 현실과 분리해서 본 그는 이데아를 배척하는 물질계로서의 현실을 소개합니다. 이러한 이원적 세계관은 어거스틴의 에 녹아들어 “두 사랑이 두 개의 도성을 만들되 하나님을 배제한 자기 사랑이 지상의 도성을 만들고, 자신을 배제한 하나님 사랑이 천상의 도성을 만든다”는 논지로써 중세교회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종교를 벗어난 물리학에서 블랙홀이라는 가설이 제기되면서 4차원이라는 가상의 공간적 세계가 개진되기도 합니다. 1차원은 점, 2차원은 선/면, 그리고 우리가 사는 실존세계를 3차원으로 보는 그것은 인간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공간을 4차원으로 상정합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와, 이 4차원을 영성이라고 소개하는 말도 간혹 듣습니다. 무엇이든 믿는 대로 된다는 논지로 상상하고, 믿고, 꿈꾸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면서 그 꿈/상상세계를 4차원으로 명명합니다. 결과적으로 는 현실과 정신 간 괴리를 가져오는 숱한 유사 듀얼리즘을 양산했고, 은 본의 아니게 신앙의 이중적 행동내지 특수주의를 재생산했으며, 물리학적 듀얼리즘은 이데아와 신의 도성을 로 몰아넣어버렸고, 뭐든 상상대로 된다던 영성은 4차원 세계에 있던 을 이 실존세계로 가져오는데 성공합니다.

프린서플 | 의인 집단의 듀얼리즘

원적 세계의 문제는 그것이 철학적인가, 종교적인가, 과학적인가, 아니면 그 복에 귀납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관점과 판단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어떤 이원적 양식이든 그 속에서 우리가 결부 짓는 선악의 구도와 그에 따른 양심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구도에 직면하든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선으로, 그리고 타자를 그 모든 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의인들의 세계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우리 편”에 계시다고 말합니다(시 124:2). 그 편은 바로 시온 산이요 예루살렘으로서 흔들리지 않고 영원한 세계로 받아들여졌습니다(125:1-2). 시온과 예루살렘에 준거하는 이들은 선한 자들로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이기에 선대를 받아 마땅하고, 그 신앙적 성지에 준거치 아니하는 자들은 야웨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신 이들이라고 믿었습니다(vv. 4-5).

둘째, 의인들의 행실
그 준거집단 곧 그 의인들의 행실은 세월이 흘러 규정적으로 변모합니다. 부정한 손, 씻지 아니한 손으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시장 통을 돌아다니다 올라치면 물이라도 한번 뿌려야만 뭔가 의인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막 7:4-5). 자신의 신체를 통해 영혼이 오염되었을까봐 그토록 주의를 기울일 정도이니, 자기와는 다른 사람들(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당연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 의인들이 지니고 있는 행실이었습니다.

셋째, 의인들의 세계 붕괴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대화를 통해서 “자녀들”과 “개들”로 전통 속에 자리 잡힌 두 세계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자녀 곧 유대인들 자신과, “개들”인 이방인들 세계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해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말씀을 통해 그 전통적 구속사 입장도 듣게 되지만, 아울러 우리는 “상 아래 개들로서 그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말에 대한 예수님의 인준을 통해 그 두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인준의 근거를 “이 말을 하였으니…”(막 7:29)라고 밝히심으로써 그 벽을 허물고 두 세계를 이은 그것은 바로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c.f. 마 15:28).


에필로그 | 듀얼리즘의 해제(解除)

우리에게 명백한 듀얼리즘 세계는 “과거와 현재”뿐 입니다. 또한 그것은 “현재와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연결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그 ‘사이’의 붕괴가 예수님의 신체를 통해 이룩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그분의 몸으로 이룩된 회개를 통해서만 그 과거와 현재의 인과관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을 뿌린 자들은 재앙을 거둔다고 본문을 말합니다. 또 본문은 말합니다. 복을 받는 자는 단지 복을 4차원에 넣고 흔들어 뽑아내는 자들이 아니라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들이라고-.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기를 “개들”이라고 간주하는 그들도 포함 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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