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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로 설교를 했을 때 과거(3년 전)의 논지와 지금의 논지 변화를 비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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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로 인한 문학계의 표절 이슈와 함께 기독교계에서도 표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목회자의 설교를 놓고 표절 운운한다는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해 아래 새 것 없기 때문이다. 설령 표절해서 이익을 본다 하더라도 그 목회자의 영은 궤멸할 것이다.

독창적인 설교를 원한다면 자기 반성적인 설교만 한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설교의 자기반성을 절대 돕는 것이 또한 성서일과이다.

성서일과를 한 회전(3년) 하고 보면 설교의 변화, 즉 내 사고의 발전 또는 철회 또는 갱신을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과거에 기록물로 남긴 설교를 삭제해버리고 싶을 정도의 변화까지도 피할 수 없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성령강림절 2-3주차 간격에 나는 다음과 같은 논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마가복음 3장 39절 본문에 대한 이해인데

당시 나는 게르하트 타이센이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자연 기적’을 따로 분류함으로써 사실상 믿지 않는 논지를(그는 축귀의 이적만 믿는 경향이 있다) 끌어들인 다음, 그 본문의 맥락이 ‘씨 뿌림과 결실’ 본문과 이어져 있음을 강조하여, 씨 뿌림과 결실의 이적은 풍랑을 잠잠케 하는ㅡ 자연을 다스리는 ㅡ이적에 상응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 마가복음과 평행한 사무엘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를 구성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려는 계획을 이미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려는 뜻으로 간주하셨다(삼상 8:6-9). 게다가 왕의 제도를 요구한 것은 사실상 사무엘 일가의 세습을 반대하는 요구에 기반하기 때문에(8:5) 사무엘 입장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된 재앙이라도 내렸으면 체면도 세우고 좋았을 법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한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ㅡ 삼상 11:14-15

우리는 여기서 참 목자상을 발견한다.

화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화목 시키는 사무엘상(像).
그리고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상.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 가르치고 배워왔다.
어차피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는 “사울,”
어차피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는 “다윗,”
무시무시한 순종을 요구하는 “사무엘,”
끝으로,
다윗과 사무엘과, 그리고 내 편만 드는 “하나님.”

위의 본문이(삼상 11:14-15) 바로 성서가 말하는 “새로움”의 모체 중 하나이며,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란 칭호에 대한
모상(模像)이기도 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ㅡ 고후 5:17.

“새로움”은 화해 속에만 존재한다.
화해 밖에 있는 것은 새로움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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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무엘을 화해의 인물로 추앙했던 셈이다.
당시로서도 이것은 파격적인 변화였다.
왜냐하면 그 이전만 해도 나는 사무엘을 다윗 왕조의 등장과 함께 출현한 사실상의 가상 인물로 보는 신학의 조류에 꽤난 깊이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은 최근에 같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논지이다.

고린도후서 6장4절에는 자천(自薦)이라는 말이 나온다.
자천(συνιστάνων ἑαυτους)이란 스스로 추천하였다는 말이다.
사도(απόστολος)라 함은 ‘보내심을 받은 자’이거늘
‘스스로를 추천하였다’라는 이 초라한 표현에서
우리는 바울이 사도로서 처했던 옹색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고후 6:12)

바울의 이 당당함은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지녔던 호기어린 용기와 같은 것이며(삼상 7),
배 고물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이 풍랑과 바다를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여 고요케 했던 권위와도 같은 것이다(막 4:39).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풍랑을 잠재우는 이 권위를 기우제 정도로 오인한다거나,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을 원수 골리앗으로 간주한다거나,

이러한 오인들은 다 적용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화해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다.
3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1) 역사적 적용, 2) 신앙적 적용, 3) 실존적 적용 따위를 좀 더 명확히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1) 역사적 적용은 다윗과 골리앗.
2) 신앙적 적용은 예수님의 풍랑을 다스리심.
3) 실존적 적용은 바울의 초라함.

성서일과 | 성령강림절 제 4주차, 삼상 17:(1a, 4-11, 19-23), 32-49; 시 9:9-20; 고후 6:1-13; 막 4:35-4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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