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방언과 예언에 대한 올바른 사용법을 담고 있다.

 

매일묵상/ 2016년 1월 25일 월요일

본문: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 /중략/ …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 /생략/…

ㅡ고린도전서 14:1-12.

관찰:

1.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절)
2.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2절)

묵상:

3. 뭘 하든 알아듣게 하라…

느낀점:

4. 아니? 예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함아니던가? 예언이 믿는 자들을 위함이라니?
아니?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니? 방언 받으면 일자 무식도 영어를 솰라 솰라… 외국어를 한단 말인가? 이 방언이 그 방언이여?

해설:

5. 보다시피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방언과 예언 사용법이 나온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방언하면 통역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이 방언하면 또 통역을 하고, 예언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예언을 하면, 다음 사람이…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던 듯하다. 이것을 현대에 적용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따른다.

우선 (1) 예언(프로페테오)의 형식이 분분하다. 점치듯 알아맞히는 것도 예언이지만, 상대가 인정하지 않거나 간과해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면 그것도 예언이기 때문이다. 즉 “당신은 전공(직업)을 바꾸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겁니다.”라는 말은 신점(神占)의 형식으로도 말할 수 있지만 충고의 형식으로도 얼마든지 말할 수도 있다. “술, 담배를 끊으십시오.”도 예언이라는 말이다.

(2) 이것이 기록될 당시 예배 예전과 지금의 예전에는 차이가 있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식의 별도의 설교가 없었다. 바로 이 교회활동(activity)이 그것을 대신했다. 방언이든 예언이든 복수의 사람이 차서있게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14:27). 그런데 그 예언이 전혀 지혜롭지도 못하고 엉뚱할 때에, (교회 생활 하면서 모임 같은 거 하다보면 엉뚱한 말 하거나 전혀 포인트 없는 말 하는 사람 때문에 시간 낭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보다 지혜로운 예언에 의해 제지 받아야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32절). 예언으로 어지러웠던 것도 그 때문이며(33절) 특히, 여성을 잠잠하라고 했던 성차별적 명령은 바울이 특별히 여성을 인정치 않는 성차별 때문이 아니라 당시 교육 혜택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던 여성의 발언은 예언에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어지러움과 질서를 이렇게 통제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14:37)

사도나 선지자 보다 더 높은 표준이 바로 “편지”라고 말하는 사실도 놀랍지만 “주의 명령이 편지인 줄 알라”고 쓰지 않고 “편지가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표현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설교가 나왔고 설교는 그 편지의 표준을 보충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첫째, 설교가 편지의 기능을 상실하면 표준으로서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다.
둘째, 설교가 프로페테오(예언) 기능을 상실하면 여러 사람의 방언과 예언을 제도로 독식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끝으로 셋째, 교회가 또다시 복수의 프로페테오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초대교회로의 회귀가 아니라 점집으로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지러움의 프로페테오를 개혁과정을 통해 다 다듬어낸 게 설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설교가 어지러워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넷째, 설교가 어지러워졌을 때는 복수의 프로페테오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로 회귀하면 된다.

이것이 성경에 임하는 자세의 기본이다.

※ 아울러 방언이 믿지 않는 자의 표적이라 함은(22절) 일자 무식이 언제나 영어, 일본어를 솰라 솰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도행전 2장부터 엘람바논 프뉴마 하기온(성령받음)에 대한 지속적인 표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로 시몬 마구스는 이 장면을 목격하고서 이 능력을 돈으로 사려고 한 바 있다. (cf. 행 8:9-24)

결단과 적용:

6. 방언과 예언은 명백히 교회를 위해 부여된 은사가 확실한데 오늘 날은 그것을 그릇 사용함으로 일부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고, 그리고 일부 몰지각 한 사람은 그것들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기도:

7. 나― 신령한 은사를 주소서.
너― 장성한 자들이 되게 하고서.
우리― 온전한 교회 되게 하소서.

 

그림묵상:

“Love is the concrete, orienting motivation that explains why prophecy is preferable to speaking in tongues and why order is preferable to chaos. . . .” “Quaker Meeting” (English School, 18th or early 19th century). Oil on canvas. Museum of Fine Arts, Boston. Bridgeman Art Library.
“Love is the concrete, orienting motivation that explains why prophecy is preferable to speaking in tongues and why order is preferable to chaos. . . .” “Quaker Meeting” (English School, 18th or early 19th century). Oil on canvas. Museum of Fine Arts, Boston. Bridgeman Art Library.

사랑은 견고하되 혼돈보다는 질서가 더 좋은 이유, 그리고 예언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그 동기에 맞춰져 있다.

cf. Lectionary, Monday (January 25, 2016): Psalm 119:89-96; Jeremiah 36:1-10; 1 Corinthians 14:1-12.

 

이 글의 앞선 글 당신은 문서 예언자가 되십시오를 참조할 것.
그외 방언과 관련된 이 블로그의 글들은: 노우호 목사의 악령 방언(γλώσση)설은 다 옳은가?
기독교의 방언은 왜 이상한 말(glossolalia)인가?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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